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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춤을 추는 당분간, 여자, 여자들, 친구들

양효실
 

더러운 회색

이제의 2021년 개인전 <페인팅 기타 등등>은 자화상, 인물화, 풍경화와 같은 전통 장르를  환기시키면서 동시에 천에 올려지고 함께 섞이고 뭉개진 물질-즉물성으로서의 회화 자체를 소환한다. 배경이나 바탕이 있고 등장인물인 바 이제의 여자들이 보인다. 회화이고 이야기가 있고 매체에 대한 실험보다는 매체가 전달할 수 있는 것들이 여전히 보인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이제는 화가로 남으려는 듯하다. 회화-이후의 회화란 21세기(말)적 신어는 회화의 자기완성이나 자기소진 이후에 회화가 (안)하고 있는 것을 명명하면서, 변증법적 운동과 모순을 동시에 보유한다. 나는 이제의 회화를 지금 회화는 무엇을 (안)하는가, 란 질문에 대한 반응/대답으로 읽을 것이다. 먼저 메일로 받은 ppt 파일 속 이제의 그림-이미지는 부드러운 느낌의 회화였지만, 작업실을 빽빽하게 채운 작품들에서 제일 먼저 받은 인상은 ‘더러운 회색’이었다. 화가를 위해 준비해 간 이야기보따리를 풀거나 어휘 사전을 펼칠 타이밍이 계속 늦춰졌다. 회화의 더러운 회색이 회화의 본질과 회화의 무화 사이에서, 회화의 개방과 회화의 폐지 사이에서 말문을 어떻게 열 것인지 실눈을 뜨고 보는 것 같았다. 말은 타협이니, 나는 결국 이제의 회화의 환원된 본질이자 반-회화적 태도인 바 더러운 회색-회화를 바깥의 도시, 근대의 인공성, 해방적 역사의 실패와 연결지으면서 내가 느낀 현기증이나 울혈증을 넘어서려고 했다. 너머나 이상, 현현이나 상징적 재현을 차단하는, 그 모든 시뮬라크르적 현세의 토대이자 바탕인 색. 이제의 회색은 이상적 휴머니즘의 맨 밑에 놓였다가 동시대 재난과 파국 덕분에 드러난 동시대적 삶의 배경이기도 하다, 라고 나는 나 자신을 설득했고 납득했고, 그렇게 해서 이제에 대한 나의 반응, 말하기의 말문이 열렸다. 이제의 동시대 서사의 토대는 붕괴된 현장이고, 이제의 회화적 본질은 회색이고, 이제의 회화는 자기-부정의 운동으로서의 변증법과 자기-분열로서의 모순을 동시에 겪으면서 가고, 가면서 중지한다. 붓, 손, 나이프, 천을 사용해서 캔버스에 안착된 유화 물감은 덕분에 면, 레이어, 질감, 재현적 이미지, 심리적 형상 같은 것을 만들어 내고, 지시적 제목―가령 <한강>, <인왕산>, <습지> 같은―이 없었다면 흔적이나 얼룩, 반영으로 보였을 것들이 덕분에 사람, 나무, 한강 다리나 저녁노을 등등으로 읽히면서 상상하고 꾸며내고 즐기려는 유희적 욕망을 자극한다. 재난과 파국이, 전진의 발걸음이 다다른 끝이, 맞닥뜨린 회색이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한다. 임박한 죽음이나 실패나 사라짐을 목전에 두었을 때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 상자 맨 아래 침전물인 비밀을 위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는 회색과 함께, 회색 덕분에 비로소, 회색으로부터 시작한다.

         

여자 1

나는 이제 이제의 회화 덕분에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평소에는 별로 할 일이 없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먼저 비교적 대작에 속하는 <당분간, 200x150cm>을 본다. 회화를 보는 습관상 우선 매트하게 바른 회색 바탕이, 그 다음으로 한 덩어리의 구름이나 그을음, 얼룩, 풍경 같은 배경이, 마지막으로 배경과 분간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여자, 긴 머리에 작업복 차림의 여자가 눈에 들어온다. 여자는 오른쪽 하단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다. 배경-풍경의 일부처럼 숨은 듯도, 녹아드는 듯도, 나타나는 듯도 한 이 모호한 여자는 그러므로 ‘중요한’ 인물/주인공의 심리나 내면, 정체성을 위한 것인 재현주의적 관습을 슬며시 밀쳐낸다. 얼굴과 살짝 드러난 목을 중심으로 옅게 발라진 붉은 색조는 유기체의 모터인 심장이나 거죽인 살이나 인간-동물의 체온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뒷짐을 지고 두 다리로 서 있는 사람은 어떤 느낌을 주는가, 혹은 그런 사람은 어떻게 읽는 게 사회적/집단적 관습인가를 생각한다. 자신이 하는 일을 그저 하는 사람, 그러다가 잠시 쉬려고 밖으로 나온 사람, 자기보존이나 자기강화와 같은 거창한 목적은 없는 듯 그저 하루를 규칙과 반복으로 메우고 살아내는 것이 일인 사람, 등등의 문장을 나는 이 여자를 위해 줍는다. 이쪽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을 흘깃 바라보는 여자의 무심함, 이란 문장도 줍는다. 재난과 파국이란 동시대의 거대-서사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 그렇다고 몰역사적인 초연함이라고 읽기는 어려운, 지극히 현실적인 복장과 태세뿐인 거기/여기 사는 여자. 나는 이 여자가 맘에 든다고 적는다. 이런 여자는 결핍, 소외, 자유 같은 휴머니즘의 키워드, 위대한 회화의 죽음 같은 것에 일희일비할 것 같지 않다. 단단하다, 무심하다, 나-자신임에 대한 긍정도 부정도 할 새가 없이 그렇게 자기이다. 세상의 평판이나 인정, 세속의 처세는 이 여자를 움직이지 못 한다, 라고 나는 오직 그려진 것에 불과한 이 여자의 겉모습과 이 여자를 둘러싼 풍경을 단서로 이 여자를 잘 아는 것처럼, 오래 못 보고 있는 지방에 있는 내 친구 하나를 떠올리면서 풀어본다. 자기자신임에 편안해하거나 ‘그런 거지 뭐’의 무심함이 잘 어울리는 여자. 제목 ‘당분간’은 이제가 애독하는 시인 최승자의 시 제목이다. 바깥에서 유령-잡초-생목숨으로 생존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최승자의 시에서 ‘당분간’은 강, 들판, 하늘, 사람들, 그리고 최승자 자신도 무탈한 지금을 가리킨다. 당분간은 곧 닥쳐올 재난이나 파국의 전조이다. 당분간의 한시성을 망각한 자는 놀랄 것이고 당분간의 역할을 아는 자는 당분간에 충실할 것이고 당분간의 미혹에 속는 자는 파국과 재난에 스러질 것이다. 최승자는 무탈한 지금을 당분간이라고 제한함으로써 풍경과 사물과 사람의 ‘자연스러움’을 비-자연화한다. 재난을 겪을 때 충격의 정도는 일상의 무료함이나 평화의 정도가 좌우한다. 시 <당분간>은 대체로 재난인 일상, 일상을 재난으로 상상하고 앓는 최승자에게서는 드물게 나온 ‘긍정적인’ 시이다. 물론 서정적인 풍경에 대한 긍정적 묘사는 5번 등장하는 당분간이란 부사로 인해 불안, 파괴, 몰락을 이미 담지하게 된다. 최승자의 재난과 파국의 양화인 듯 보이는 이 세계는 당분간이란 단서에 의해 별 볼 일 없는 것으로 추락하는 것 같기도 하다. <당분간>의 최승자를 따르는 이제의 회화 <당분간>은 끔찍한 사건들, 재난들의 부단한 연속으로서의 포스트-역사의 현재를 너무 슬픈 것도 너무 고통스러운 것도 아닌 채로 통과하는 담담한 사람들, 여자들의 제스처나 행동을 시각화한다.

그래서 대작 <당분간>의 여자를 버스트 숏으로 클로즈업한 것 같은 소품 <당분간>, <산책>의 ‘주인공’인 여자들은 시시하고 별 뜻이 없는 행동으로서 우리와 밀착한다. 회색이 아니었다면 어떤 정서, 내면을 번역한 것으로 해석되었을지 모르는 배경을 뒤로 하고 역시 맨 오른쪽으로 내몰린 <당분간>의 여성은 머리 위로 깍지를 낀 두 팔과 내쉰 숨으로 겨울을 암시하면서 별 뜻 없이 이쪽을 응시한다. 저런 포즈를 해보면 아시겠지만, 어깨는 시원해지고 날숨을 쉰 뒤이니 신체의 긴장은 최소화된다. 시시한 제스처 뒤에 오는 만족감이나 편안함. 뭉개진 붉은 색과 최소한의 윤곽으로 여자처럼, 사람처럼 보이는 이 인물의 별 뜻 없는 시선도 내 눈에는 역시 매력적이다. 통상 여자를 볼 때 여자도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어 있는 시각적 구조 안에서, 나는 이 여자를 당연히 남자의 시선으로 보면서 동시에 그 시선을 삐져나가는 다른 여사를 보고 있다. 이 여자의 포즈나 시선, 혹은 포즈로서의 시선을 번역할 ‘충분한’ 어휘는 나뿐 아니라 페미니스트에게도 부재한다―타자의 말은 내부의 오염된 말이다. 충분히 여자이면서 여성적인 포즈가 아니다, 여성적이지만 우리의 동의를 구하는 것도 우리의 반발을 촉구하는 것도 아닌 포즈이다, 라고 나는 쓴다. 우리의 인정과 무관하게 여자는 여성적이고, 나타난 신체로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산책>의 안경을 쓴 여자는 왼팔을 올려 쏟아지는 햇볕을 차단하면서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분홍 색조가 주를 이루고 한낮의 열기가 반팔 셔츠와 반사된 빛을 번역한 색채를 통해 전해진다. 이제의 여자들은 이제의 회화가 (안)하듯이 뭔가를 (안)한다. 여자가 남자 다음으로after 반복하고 있는 인격적 주체의 포즈를 취하고 재현주의의 프레임을 전유하면서 중요한 뭔가를 하듯이 하지는 않는다. 이제의 여자들은 보인 게 자기자신일 뿐인, 별 내용이나 의미를 내뿜는 신체가 아니다. 뭔가를 하지만 거기엔 이면이나 복선, 주장이 부재한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텅 빈 행위가 우리를 사로잡는다. 의미를 갈구하고 생산을 욕망하는 우리는 이런 텅 빈 이미지, 형상 앞에서 역시 텅 빈다. 채울 수 없는 이미지, 지금이 전부인, 보인 신체가 전부인 행위는 역사의 피로나 역사 이후의 환멸이나 냉소의 침입을 모른 채로 회색조의 배경에 단지 있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이 ‘기타 등등’의 여자들, 행위들이 이제의 회화라는 장소, 지리에 깃든다. 더러운 회색이 아니었으면 안 보였을지 모르는 여자들.    

 

여자 둘, 다섯, 기타 등등

<나연과 서연>은 등장인물의 이름이 직접 거론되는 인물화이다. 이제의 여동생의 두 딸 나연이랑 서연이는 사이좋은 자매, 혹은 사랑하는 이모의 방문으로 행복한 조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하고 따듯한 포즈로 이쪽의 이모를 보고 있다. 언니를 꽉 끌어안은 동생의 언니의 몸을 타고 이쪽으로 내려온 오른쪽 발은 거의 그려지지 않았거나 지워졌는데, 거의 없는 발의 명랑함은 역시 그 아래에서 꽉 끌어안은 채 놀고 있는 고양이 두 마리, 한참을 보아야 둘로 보이는 고양이들과 하나로 이어진다. 둘의 반복, 리듬으로서의 함께 있음. <초가 있는 풍경>은 부는 바람의 방향을 가리키는 초가 둘, 둘, 둘, 셋 보이는 네 개의 캔버스가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계산에 근거한다. 아이들, 고양이들, 양초들이 대신 맡은 둘, 함께 있음. 그리고 이제의 친구들이 복수의 인물로서 등장하는, 아주 멀리서 그려진 회화들. 풍경화에 더 가까운, 사람은 뭉갠 얼룩이나 몇 번의 붓자국으로 치환된 회화들. 대작인 <들판, 130x162>에서는 낮게 깔린 수평선을 향해 간격을 두면서 함께 걷거나 달리는 다섯 명의 여자들이 보인다. 펄럭이는 옷자락에 진배없는 여자들-신체는 대충 남은 얼룩이나 암시가 더 명징하게 구현하는 실존으로서, 유령처럼 바람처럼 풍경을 타고 흐른다. 나타나는 게 사라지는 것이고, 함께 있는 게 각자의 고유한 무게나 질량을 잃는 것이라는 것. <우리의 춤은 늘 뜻밖에 시작되지, 150x150>는 <들판>보다 더 줌 아웃되게 그려졌다. 등장하는 여자들이 몇 명인지는 정녕 알 수 없고, 좌우를 차지한 거대한 나무 기둥 안에서 여자들은 제목에 따르면 춤을 추는가 보다. 보고 그린 게 아니라 “고립된 상황에서 나타나는 심리 상태와 몸의 사건들을 추상과 구상이 뒤섞인 회화 이미지로” 그리는 이제의 여자들, 친구들은 그러므로 이제의 인위적으로 구성된 풍경, 장소로 초대되어 함께 춤을 추는 바람이나 구름이나 풀이 된다. 화면 하단의 틈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은 미약한 노랑, 높은 명도의 노랑이 춤, 리듬, 명랑, 가벼움의 은유를 강화, 반복한다. 춤은 공간을 시간화하고, 신체를 이미지화하고 장소를 신체화하는 예기치 않은 리듬이다. 춤은 오직 잇고 뭉개고 연결하는 데 신체를 사용한다. 춤은 뜻 없는 행동, 비워진 신체, 오직 움직이면서 이미지나 형상을 흘리는 신체에 대한 것이다. <나의 친구들에게, 116x90>는 화가 이제가 3년에 걸쳐 그리고 지우고 포개고 덮기를 반복하면서 미결정 상태로 남은 회화에 이니셜로 등장하는 친구들이 보내온 문장들을 옮겨 적어 완성한 작품이다. 그리고 한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함께 춤을 추는 모습으로 이제에게 각인된 친구들이 보내온 문장들, 이제가 시작한 문장을 이어서 각자 써내려 간 문장에서 우리는 같은 풍경, 경험, 재난을 통과한 이들의 공통감각을 읽게 된다. 친구여서 닮았거나 비슷한 감각을 갖고 있기에 하나의 둘의 다섯이거나, 같은 상실과 같은 무늬를 간직한 이들이 함께 쓴 문장으로도 드러난다. 푸르른 초록과 그 위에 슬쩍 첨가된 붉은 색이 꽃일진대, 검은 바탕에 함께 적어나간 문장에 각인된 공통의 기억이나 경험이나 이야기가 이끌 친구들의 ‘이후’는 견딜만한 것일 것이다. 기념비적인 회색조의 풍경을 과격하게 횡단하는 평면 위에 작게 적힌 <하이웨이>의 ‘살자!’는 계속 가자는, 죽지 말고 버티자는 ‘눈꼽만큼’ 들리는 외침이다. 죽는 게 더 쉬울 것 같은 상황에서, 네가 죽으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이미 겪었으니까, 너무 많은 죽음을 기억하는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나도 모르니까, 그래도 나는 너 때문에 사니까 살자고, 암시나 우회나 은유 없이 그냥 정면으로 꽂히는 살자!       

 

전시공간 <산수문화>의 정면 윈도우를 채울 삼부작 <나이트로즈>는 역시나 지시적 제목이 없었다면 장미로 읽히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 꽃그림이다. 더는 인용하고 그리기 불가능할 정도로 닳아버린 개념, 기호인 장미의 재활용. 한밤의 장미, 대충 그리고 칠한 장미, 붉은색이 아니라 희거나 푸른색으로 치환된 흐드러지게 핀 장미. 수직의 띠줄에 의해 평면의 간섭을 받고 있는 풍경. 어떤 왜곡과 변장과 개입에도 여전히 장미인 장미. 우리는 그렇게 젊었고 푸르렀고 장미였고 진동하는 향기였다는 것. 그것은 닳고 닳은 회화에도 적용될 항변, 속삭임이고.

그래서 더러운 회색은 회화의 변증법적 운동의 한 국면이거나 회화가 맞닥뜨린 아포리아인 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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