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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기 위해서 지우기 / 김상우

개인전 ‘꽃배달', 갤러리킹, 2009

 

“브리슬리 씨, 우리들 대부분은 추상이라는 말이 무의미한 용어가 되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현실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너무도 많이 변했으니까요.”

“나는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르오. 미술 역사상 가장 큰 배신이지.”(파울즈)

 

1. 추상과 구상은 오랫동안 예술을 지배했던 씨줄과 날줄이다. 그것들은 번갈아 그림의 세계를 지배하며, ‘시각의 문법’을 구축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형성된 무늬를 따라 세계를 응시했고 사물을 그려냈다. 물론 어느 것이든 한 쪽을 완전히 밀어내진 못했고, 시대마다 다른 방식으로 기묘한 동거를 허락했다. 어떻게 보면 20세기도 비슷했다. 구상이 나름의 목소리를 냈지만 소규모 참호를 파고 각개 전투하는 정도였고, 추상의 약진은 거칠 것이 없었다. 과거는 다시 한 번 반복된 것 같았다. 하지만 옛날과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여기서 사진을 떠올리기 쉬우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언뜻 보기에는 그렇다. 사진이 등장하고, 회화는 추상으로 전회하고. 사이도 좋게 시각의 지형은 재편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지각에 일어난 변화. “19세기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상술된 칸트의 초월적 관점과 선험적 종합범주가 꾸준히 허물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크래리) 이때부터다. 주체가 감각지각을 종합할 능력을 상실한 것은.

 

2. 20세기는 더 나아갔다. 균열에서 비롯된 소외는 문제도 아니었다. 정신의 분열이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했으니까. 이 결과, 손과 발이 따로 놀 듯, 의식은 안에서 엇박자로 놀기 시작했다. 사진은 그것을 ‘표현’했던 것이 아닐까. 의식이 무의식에 지배되듯이, 인간이 기계에 포박되는 것을. 그래서 소외되는 ‘자아’와 ‘작품’들도. 회화에도 이 같은 변화는 담기게 마련, 우선은 내용으로 진행됐다. 평면에 어릿광대가 등장했다. 줄어들고 희화화되고, 그것은 주체와 작가가 소외된 결과다. 모더니즘이 괜히 병든 양식이란 말을 듣는 것이 아니다. 다음은 형식으로 진행됐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다. 지적했듯 사진은 지각의 변화의 ‘표현’이다. “오늘날 우리가 맞이한 지각매체의 변화를 아우라의 쇠퇴로 파악한다면, 그것의 사회적 조건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벤야민) 당연히 ‘예술적 조건’도 뒤따랐다. 그때부터 작가는 분열된 의식을 추스러야 하는 동시에 ‘사진적 시각’까지 대결해야 했다.

 

3. 이후의 예술적 반응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격렬한 거부. “추상 충동은 외부세계의 현상에 의해 야기된 인간의 과도한 심리적 불안감의 산물이다.”(보링거) 그것은 영혼으로 침잠하는 길이었다. 다른 하나는 노골적인 동화. “세계는 잠시 깊이를 잃고 유리피부, 입체경적 환영, 한 무더기의 무밀도 필름이미지가 될 위험에 빠진다.”(제임슨) 그것은 영혼을 저버리는 짓이었다. 포토리얼리즘은 눈을 기계눈 렌즈로 맞바꾼 결과였다. 어느 것이 됐든 저 브리슬리 씨가 보기에 ‘배신’이긴 마찬가지다. 작가라는 존재와 그림이라는 행위를 외면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배반이라면 오늘도 내일도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리라. 특히 시장의 손아귀에 넘어가, 유행에 휘둘리는 오늘날의 미술판을 생각해 보라. 물론 어느 누가 자본의 올가미를 찢고서 나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올가미가 쳐졌다는 것, 그 너머를 고민한다는 것, 최소한 그것만큼은 필요하지 않을까. 작가 이제는 그래서 매우 드문 경우다. 인간-기계가 되는 사물화도, 추상-기계가 되는 합리화도, 더욱이 생산-기계가 되는 상품화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길이 멀고도 험난한 길임에는 분명하다.

 

4. 작가 이제는 지금까지 일상을 담아왔다. 걸었던 길, 살았던 장소, 올랐던 동산 등등, 우리네 인간이 스쳐가듯 지나치는 풍경을 응시했다. 첫 번째 개인전 <우리의 찬란한 순간들>을 보자. 주변의 풍광이 하릴 없이 펼쳐진다. 마치 무심코 누르는 한 컷의 사진처럼, 누구도 기념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이 앨범을 넘기듯 자그맣게 쌓았다. 작은 것들을 작은 목소리로 ‘부른 는 것’이다. 현실과 평면 사이에 자신을 던져서 ‘공명’시킨다고 할까. 다음에 보인 행보는 상당히 극적이다. 그녀는 균형의 추를 급격히 왼쪽으로 기울인다. 현실 쪽으로 급격히 육박해 들어간 것이다. <산따의 투유투미 프로젝트>는 한센인과 이주민과 함께 진행한 공공미술 작업이었고, <기는 풍경>은 작가 두 명과 함께 한국의 부박한 현대를 설치로 표현했다. 모두가 ‘함께’ 진행한 결과며, 장르를 넘어선 ‘활동’이었다. 마치 현장에 뛰어든 활동가와 같았다고 할까. 그녀가 동년배 작가와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남들이 시장에 뛰어들 때 ‘유행’과는 상관없이 현장으로 갔으니까. 하지만, 예술가가 활동가일 수는 없는 법, 현실로 기울었던 추는 다시 평면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개인전이다.

 

5. <꽃배달>도 옛날처럼 일상을 응시한다. 꽃배달 하는 사람의 뒷모습, 공사장 인부들, 등다는 사람들. 도심에서 익히 볼만한 풍경이 담겨있다. 그러나 담기는 방식이 예전과 달라졌다. 현실에 밀착했던 만큼 퉁겨져 나온 것일까. 무엇보다 그녀는 버린다. 윤곽을 지우고 색감을 거른다. 예를 들어 <꽃배달>을 보라. 형태는 주변과 녹아들고, 심한 것은 아예 하얗게 날아간다. 색감도 마찬가지. <우리의 찬란한 순간들>까지만 해도 흐릿하긴 했어도 사실적으로 묘사됐다. 그랬던 것이 이번에는 몇 가지 원색으로 축소됐다. 그래서 언뜻 보면 그리다 만 것처럼 보인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단순히 날것 같은 현실에서 튕겨져 나온 것일까. 그럴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것만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작지만 단초를 평면에 갈무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결코 바깥을 놓지 않았다.

 

6. 오늘날 회화는 지난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 예전에 너무나 많은 길이 났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자기만의 길을 찾기도 어렵다. 뿐만인가. 회화는 자신에도 자기 아닌 것에도 소외된 탓에, 누가 진지하게 보아 주지도 않는다. 캔버스 메고 아트페어로 돌격하는 시대에 무슨 말이냐 하겠지만, 소문난 빚잔치일 따름이다. 그러니 이제가 진기한 것이다. 기나긴 회화의 역사를 몸으로 짧게 다시 쓰기 때문에, 거기서 무엇인가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하는 법이다. 반복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도약은 항상 일반이 아니라 개체에서 발생한다. 작더라도 말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성찰’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있다가, 타인의 현실을 거쳐서, 다시 온전히 자기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 말을 아끼고 줄일 수밖에. 중요한 것은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성찰의 힘은 거기서 나온다. 그리기 위해서 지우는 것이다.

 

7. 허나 얼마나 어려울까. 바깥을 보면서 지우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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