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흥 갤러리 개인전 서문 / 강홍구
금호동 - 슬쩍, 곁눈질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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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를 비롯한 이미지들은 세계에 관해 환유적으로 말한다. 특히 재현적 회화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클로드 로랭이든,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든, 조맹부건, 정선이건 마찬가지다. 그 까닭은 회화가 은유와 직유와 같은 일반 언어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근본적인 것은, 화가들, 그림을 그리는 자들은 세계 전체를 조망하고 그에 관해 추상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말하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그것은 관습이자 선택이며 조건이다.
조건, 관습, 선택으로서의 회화, 특히 재현적, 구상적인 회화들은 그러므로 관념과 개념보다 구체성과 물질적 생생함이 먼저이다. 어쩌면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화의 태생적 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회화란 홍역과도 같은 것이어서 앓아보지 않으면 그 과정을 도저히 알 수 없다. 그 열과, 몸을 꼼짝도 하지 못하는 고통을 단지 열꽃을 보고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회화는 그림을 앓는 자들이 피우는 일종의 열꽃 같은 것인데, 그것을 바라보고 병에 관해 짐작하는 것과 겪는 것 사이에는 깊은 단절이 있다.
또한 회화는 육체적 욕망이다. 때문에 미술사 속 회화는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행한다. 왜냐하면 이념적, 개념적으로 회화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이 육체를 가진 한 회화 자체를 말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육체를 버리고 지상에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 붓을 든 자의 고민은 그러므로 미술사 속에 회화가 죽었는가 말았는가에 있지 않다. 문제는 세계의 근본적인 재현 불가능성에 있다. 그것은 단순한 리얼리티와 그에 관한 재현의 문제가 아니다.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 도전하는 자의 문제이다. 사실 이 말은 너무 장엄하다. 왜냐하면 화가들은 불가능한 것에 대한 도전 따위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문제보다는 물질적 저항과 그것을 굴복시키려는 시도 사이의 실질적인 부딪힘에 관해 고민하고 무엇인가를 얻기 때문이다. 그리는 자가 다루는 물감, 붓, 캔버스, 종이 따위의 도구들은 인간 신체의 연장이지만 늘 그리는 자의 의도에 저항한다. 그 자체로 존재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바르트가 언젠가 사이 톰블리의 그림에서 말했듯이 물질들, 물감들은 원상태로 존재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화가가 물질을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 혹은 의도에 종속시키려 할 때, 거기에서 한 판의 싸움, 긴장이 발생한다. 누군가는 물질을 완벽히 종속시켰다고 기뻐하고, 누군가는 또 그 물질과의 긴장을 별것 아닌 듯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는 자의 의도와 물질들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고 약간 어긋나 있을 때, 즉, 물감이, 붓자국이, 캔버스가, 종이가 본래의 그것들이면서 동시에 다른 무엇이 될 때 회화는 살아있게 된다. 그 살아있음은 그리는 자가 매번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로렌스의 말을 빌자면 세잔조차도 일생 동안 겨우 몇 개의 사과에서나 이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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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의 그림들은 그러니까 그 긴장을 이루고 싶어 하는 자의 탐색의 결과이다. 그의 탐색은 두 개의 층위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장소들에 관한 탐색이다. 금호동, 난지캠프장, 자신의 작업실, 남의 작업실에 대한 공간적 탐색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다루는 물질들과 자신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공간적 탐색은 사적이고 미세하며 구체적이다. 그것이 그의 강점이다. 애매한 추상적인 원칙과 개념을 애완견처럼 앞세우고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에서 시작하는 것. 구체성은 생생함을 담보한다. 아니 담보하지 못한다. 단지 필요한 조건들일 뿐이니까. 이제의 그림 속의 장소, 더 정확히는 그림들이 장소성, 혹은 바로 그곳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담고 있을 때 볼만해진다. 금옥초등학교의 눈 내린 운동장, 난지도의 캠프, 개인 작업실들, 금호동 풍경의 일부가 그렇다.
앞서 말했듯이, 이제가 그린 그림의 한 축은 사적 공간이다. 작업실들 - 그것이 다른 작가의 작업실이든 자신의 작업실이든 - 은 몇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약간 어정쩡한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 속에서 화가들은 춤추고, 뭔가 쳐다보고, 퍼져 앉아있다. 연금술사의 방과도 같은 작업실은 한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장면들로 기록된다. 일종의 파편성, 연결된 장면들, 붓은 빠르고 묘사는 성기고, 인상은 순간적이다. 달리 말해 사진적이다. 매 장면은 의미심장한 순간이 아니라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그는 매 순간의 의미를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눈 앞의 현상을 바라본다. 그 눈길, 동료 작가들의 작업실의 순방, 혹은 구경, 바라보기는 외부로 확대 된다. 그곳이 금호동이다.
이제의 작업실 연작과 금호동 연작 사이에는 육교 내지는 지하도 같은 통로가 있다. 그것은 사실 육교나 지하도 보다는 신호를 무시하고 몰래 잽싸게 건너는 건널목에 가깝다. 그리고 이제는 거기서 금호동으로 건너왔다. 건너오게 되면 금호동은 사적인 장소와 공적인 성격을 동시에 띤다.
금호동은 이제가 서울에 올라와서 줄곧 살아온 동네이다. 즉 그의 성장과 기억이 곳곳에 침윤되어 있는 공간인 것이다. 기억이란 과거의 시간이 현재의 공간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사회학적 분석, 정신적 분석의 문제가 아닌 몸의 문제다. 인간이란 공간에 길들여진다. 길, 건물, 담, 전신주, 나무들에 의해서. 간판, 즉 문자적 기호적인 것에 의해서가 아니다.
공간에 길들여진 몸. 그래서 몸은 간판의 글씨를 모조리 지워도 익숙한 공간을 알아본다. 이제는 자신의 그림을 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그런 반응을 보였다고 전한다. 그린 자의 몸이 기억하는 공간, 금호동의 변화는 일방적이다. 산동네 집들이 무너져가고 아파트들이 들어설 뿐이다. 야산 - 가난한 상경자들이 이룬 산동네 - 연립주택 군 - 아파트로의 전이는 금호동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어디서든지 목격되는 일방통행 현상이다. 이 일방통행 앞에서 그리는 자,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는 이런 현상들에 관한 빤한 보고서를 거절한다. 빤한 보고서란 자본의 일방통행에 대한 저항의 제스쳐, 혹은 냉소, 한탄, 분노, 무력감에 대한 고백을 말한다. 대신에 이제의 시선은 평범해 보인다. 즉 보통의 풍경화 같은 양상을 취한다. 대신에 그 안의 물감들의 조건을 제한하고 그것들로 말하게 하는 영리한 전술을 구사한다. 그는 물감에서 검정색을 뺀다. 그래서 화면에서 콘트라스트를 약화시킨다. 약화된 콘트라스트는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과잉이다. 즉 덤덤함, 납작함의 과잉이다.
이 결핍이자 과잉인 전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또 하나의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묘사의 정도와 물감의 물질성 사이의 긴장이다. 묘사하려는 의지가 조절 될 때 풍경들은 지극히 범상하고, 지겨우며, 그러므로 떠날 수가 없는 일상성을 띠게 된다. 그 일상성은 숨이 막힌다. 가령 마을버스 정류장과 터널과 그 위에 펼쳐진 집들은 서울에서의 삶, 혹은 살아남기의 지표가 된다. 하지만 그 지표들은 너무나 도처에 널려 있어서 무감각해진다. 무감각함 때문에 노란 개나리와 꽃들은 자연 그대로의 생생함이 아니라 조화처럼 변한다. 그의 그림 속에서 - 사실 나는 그가 그것을 의도했는지 우연인지 모른다 - 약간 바랜듯이 채도가 낮은 노란색 개나리, 분홍색 바지, 푸르딩딩한 오토바이와 차들은 물리적으로는 아주 가까이 있으면서, 심리적으로는 저 멀리에 있는 머나먼 풍경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술에는 약점도 없지 않다. 의도적으로 구사된 그 결핍과 과잉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불분명해질 때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그 공허함은 때로 자극이 부족한 화면이나, 일관성이 사라지는 경우를 낳기도 한다. 금호동 연작 가운데 흥미 있는 작품 중 하나는 아파트에 페인트를 칠하는 사람을 그린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묘한 균형을 가진 풍경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다소 아파트 자체에 대한 묘사의 정도가 너무 나갔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줄에 매달려 페인트를 칠하는 작게 그려진 인물을 보면 그런 생각이 가신다. 페인트를 칠하는 인물은 그림의 중심을 벗어난 지점에 놓여 있어서 곁눈질로 바라보게 된다. 그 곁눈질이 사실은 이제가 그리는 그림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즉, 보는 이로 하여금 진지하게 혹은 다소 심각하게 묘사된 아파트나 꼬부라진 길, 나무들, 터널과 집들이 아니라 뭉개진 초록색 마을버스의 창, 터널 앞의 제한 속도 60 킬로미터라는 표지판, 운동장의 바퀴자국, 배드민턴 치는 사람들의 희미한 그림자를 보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의 그림은 풍경 전체, 기억과 공간에 대해 노골적으로 폭로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슬쩍 바라봄으로써 부분을 다시 보고, 생각하게 만드는 장치인 것이다. 그리고 그 장치들, 소도구와 사물들은 뭉개지고, 덜 그려지고 물감과 이미지 사이에 어중간하게 놓임으로써 긴장을 획득한다. 그 점이 바로 우리가 이제의 그림 속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지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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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동세대 젊은 작가들 사이에서 드물게 회화를 선택했다. 나는 그가 왜 그리기를 골랐는지에 관해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그의 작품의 궤적을 통해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짧은 회화적 이력 속에서 그는 손의 움직임과 인내심에 기대는 묘사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는 중이다. 이 낡아빠진 표현은 사실 다른 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인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회화는 가혹하다는 것이다. 가혹 할 뿐 아니라 몰인정하고 가차 없다. 도저히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회화는 그리는 자의 육체고 정신이다. 젠장, 이 말도 너무 장엄하니까 회화는 그냥 그림이라고 고쳐버리자. 무정한 회화 같으니라구.
강홍구(작가)
Paste and Smear
Sohyun 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