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개인전<지금, 여기>, OCI미술관, 2010

이제의 유화

 

최민(미술평론)

 

진부한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우선 이제의 그림의 소재는 다양하다. 쉽게 말해 풍경, 인물,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을 위해 철거된 황량한 산동네 풍경에서부터, 어항 속을 그린 것 같은 상상적 정경에 이르기까지. 방안에 누워 있거나 기대 앉아 있는 여인들, 황량한 산을 배경으로 앉거나 서 있는 소녀들, 벌렁 누워 기타치고 있는 소년, 멀리 그늘진 주택가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언덕의 공사장 부근,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강변의 고수부지 공원, 바람 부는 달동네 비탈길, 자리를 알 수 없는 언덕과 공사현장, 그 아래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서민 주택가 등등...

 

쓰레기로 버린 으깨어져 버린 수박덩어리들, 콘크리트 건물들을 허물고 나서 모아 놓은 누렇게 녹슨 철근더미, 한데 뒤엉켜 쌓인 폐자재 더미, 목적도 내용도 잘 알 수 없는 도시계획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대도시에서 흔히 마주치는 이러한 정경에서부터 자기 몸의 한 부분을 클로즈업 한 것 등 매우 다양하다. 마치 사진을 찍으려고 사각형 프레임을 짜기 위해 맞잡은 것 같은 두 손, 화장실에 앉아서 내려다 본 것 같은 벌거벗은 두 무릎...

 

이러한 다양성은 이제가 그전부터 특별한 관심을 갖고 보아왔다고 여겨지는 변화하는 서울의 면모, 그러한 변화의 현장인 공사장 주변의 다양한 정경,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보다 그 범위가 훨씬 넓어진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나 소재를 대하는 화가로서의 시야, 형상적 사고와 상상의 폭이 깊어지고 넓어진 것과 걸맞게 기법이나 형식에 있어서도 훨씬 유연하고 거의 거침이 없다 할 정도로 매우 다양하고 자유롭고 새로워 졌으며 각각의 작품마다 활달하고 능숙한 솜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꼼꼼한 사실적 묘사에서부터, 부드러운 붓질을 문지르듯 겹쳐놓은 것 같은 섬세한 색조의 면들로 구성된 화면, 빠르고 거친 선들이 교차하는 소략한 크로키 풍의 선묘, 낙서풍의 자유롭고 추상적 붓질, 물감을 흘리거나 흩뿌려놓은 것 같은 추상표현주의적 기법, 사진의 이중인화나 꼴라쥬적 기법을 연상시키는 합성된 것 같은 중복적 형상 등이 다채롭다. 때로는 이런 상이한 테크닉과 기법들이 한 화면 속에 절묘하게 한데 조합되어 있다. 이제는 뛰어난 기량을 지닌 화가로서 자신의 비전을 나름의 실험적 기법으로 변화무쌍하게 구현해 보여줄 수 있는 탁월한 경지에 바싹 다가가고 있다고 생각된다. 여러 작품들의 질과 수준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제는 지금 아주 잘 그린다. 좋은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우리를 기쁘고 놀라게 한다. 우리는 그의 최근 작품들을 보고 오래간만에 새롭고 경이로운 회화적 체험을 한다.

 

그의 요즘 작품들은 회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자리들이 되고 있다.

회화의 시대가 이미 끝났다느니 미술사가 종말의 지점에 도달했다는 둥 포스트모더니즘의 몇몇 사이비 종말론처럼 유행하고 있는 요즈음, 작품의 질이나 수준을 운운하고 그림을 잘 그렸다는 둥 칭찬조의 말을 늘어놓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사고나 보수적인 미학적 감수성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무시하고 싶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미학적인 것을 포함하여 문명사적으로, 또는 정치경제학적으로 무척 복잡하고 혼란스런 문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골치 아픈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고 올바른 해답이 쉽게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회화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추상회화와 미니멀리즘이 회화의 종착역은 아니다. 그런 목적론적 관념은 그린버그류의 헤겔주의 독단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전후 미국모더니즘의 편협한 미적 취향에서 비롯한 회화의 가능성에 대한 무지에 다름 아니다. 개념미술과 레디메이드, 오브제 또는 설치가 회화의 존재이유 자체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궁색한 딜레마나 출구가 안 보이는 막다른 골목을 돌파하는 파격적 장치인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근본적으로 예술적이고 미학적인 차원의 성찰에서라기보다는 미술시장이나 유행의 논리에 암암리에 종속되어 표면의 현상에 현혹되어 생겨난 효과일 뿐이다.

상투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말하는 것만큼이나 그리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원초적 행위다. 그렇기 때문에 결코 버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과 자기표현의 수단이기 이전에 그것은 인간다움의 표시이고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핵심적 요소다. 모든 이미지, 모든 형상은 바로 그리는 행위, 즉 그림에서 출발한다. 상상이란 것도 마음속에,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는 원초적 행위의 고도의 문화적 성취인 회화는 그렇기 때문에 그 외면적 형식이나 재료, 기법 또는 양식이 바뀌고 그 제작방식이나 수용방식이 계속 바뀌고 변화할지는 모르나 결코 소멸하거나 폐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젊은 화가 이제는 그 세대에는 드물게 회화의 가능성에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가지고 유화를 배우고 그리는 사람이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이제는 회화 그중에서도 서구의 고전적인 유화와 마치 연애하듯 대화를 나누고 접촉하고 애무하고 몸으로 욕망하듯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텅 빈 하얀 캔버스는 붓과 기름과 물감으로 그가 자신을 투사하고 그가 눈으로 보고 체험하고 기억한 것을 다시 기록하고 새롭게 표현하고 그가 생각한 것, 꿈꾼 것, 현실에는 없는 것, 그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형상들을 발견하고 만들고 새로 구성하고 상상하고 실험하고 더불어 같이 장난치고 놀고 온 몸과 눈과 손 정신을 함께 동원하여 자신을 고양시키고 실현시키는 이상적 장소다. 어떤 작품을 보면 이제가 그림과 함께 행복하게 춤을 추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이제는 우리가 다시 유화를 즐기고 새롭게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드물게 뛰어난 젊은 화가다. 그 자신이 유화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는 이번 전시회에서 다시 한 번 유화의 폭넓고 다양한 표현방식, 다채로운 존재방식과 유화로 그리는 일의 즐거움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그래서 반갑고 기쁘다.

 

물론 유화가 그림의 전부는 아니다. 서양의 유화보다 더 오랜 전통을 지닌 중국의 수묵화나 수채화처럼 엷게 그릴 수도 있고, 물감을 거칠게 두껍게 바를 수도 있고, 투명하게 비쳐보이듯 겹쳐 바를 수도 있고, 다시 긁어내거나 문지르거나 닦아낼 수도 있고, 분 바르듯 아주 가볍게 바르거나 불투명하게 덮어버리듯 칠할 수도 있고 섬세한 붓질들을 포개놓듯 계속하여 겹쳐놓을 수도 있다. 이제가 정말 유화를 잘 다루는 화가라는 말은 유화의 재료와 기법으로 가능한 다채로운 기법들을 폭넓은 범위에서 자유스럽게 선택하여 구사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기 위한 것이다. 이제는 그가 선택하여 그리는 소재의 다양함 만큼이나 그리는 방식에 있어서도 어떤 고정된 한 가지 수법이나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다. 이 점이 화가로서 이제의 큰 장점이다.

때로는 속도감 있는 붓질로 시원스럽게 그려낸 것이 반드시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저기 화폭에 그려놓은 게 도대체 뭐지? 하는 의문을 자아내는 형태나 이미지도 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어떤 사물을 그린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형태 또는 색깔로서 자율적 가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동시에 캔버스 위에 그렸다고 하기보다는 마치 벽 위에 갈겨쓴 그라피티를 생각나게 하는 필치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 붓질을 사용하는 방식이 자유자재로 변화하며 그 폭이 넓다. 이렇게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유화라는 재료이자 기법을 구사하는 솜씨가 놀랍다. 잘 그린다는 감탄은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잘 그린다는 것이 꼭 미덕이 아닐 수도 있다. 때로는 서투름, 때로는 치졸함이 예술적 미덕이 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니는 소위 소박미술(primitive art)이라는 것의 미덕이 바로 서투르고 치졸하다는 점에 있다는, 즉 프리미티브하다는 성질 자체가 예술적 자질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20세기 모더니즘이 발견해낸 것 가운데 하나다.

취향의 문제란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가. 회화에 대한 우리의 취향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변덕스럽고 황당하게 복잡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점에 관해서는 결정적인 해답도 없고 진리 따위도 없다. 다만 우리는 막연하게 정치적 민주주의가 취향의 상대주의와 연결된다는 것만 경험을 통해 알고 있을 뿐이다.

 

미학적 평등주의라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어불성설의 잠꼬대다. 취향의 차이와 다양성, 취향의 변화, 나아가 취향의 차이로 말미암은 경합이나 갈등 또는 어떤 특정 취향이 한 시기를 지배하고 유행을 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취향의 획일주의는 파시즘이나 전체주의 정치에나 어울리는 폭력에 다름 아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시대가 역사적으로 증명해 보여주었듯이 취향과 전제권력의 결합은 악몽이 낳은 괴물이다.

일찍이 보들레르가 산업화와 도시화의 여파로 급격한 변화를 맞은 파리에 새롭게 등장한 익명의 군중 가운데 유별나게 특징적인 한 유형의 인간으로 별 하는 일 없이 한가하게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초연한 태도로 도시의 여러 구경거리들, 갖가지 유형의 인간들을 포함하여, 가게 진열장의 상품부터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여러 물건들과 사건들을 특권적인 시선으로 관찰하고 탐색하는 것을 삶의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고 도시의 이모저모를 구경하며 산보하는 사람을 플라네르(flaneur;만보객)라고 부르며 특별한 유형의 예술적 인간으로 내세운 것은 혼란스럽고 추악한 현실을 감당해낼 수 있는 초연한 시선의 존재를 의인화한 것이다. 독자적인 시선의 권리, 달리 말하자면 정신적으로 초연한 시선의 주권(주인 됨)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그는 이미 잠재적으로 화가의 지위를 점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꼭 예술가일 필요는 없지만 예술가적 감수성을 지닌 특권적인 존재인 것이다. 화가는 다만 이 시선의 권리를 예술적으로 전유하여 구체적인 시각적 생산품 즉 회화 작품을 그려내는 전문가인 것이다.

나날이 변화하는 메갈로폴리스 서울에서 살고 그리면서 독자적 시선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이제는 화가 이전에 플라네즈(flaneuse:프라네르의 여성형)다.

 

이제가 반복하여 그리는 소재 가운데 하나는 늘어선 아파트 건물들과 아파트 건설 현장의 정경이다. 도시 일반사람들은 알 수 없는 도시재개발계획에 따라 펼쳐지는 건설 현장의 정경이다. 이런 곳은 주로 남자들의 노동이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영역이기 때문에 여성이 접근하는 것 자체를 반기지 않는 분명하게 성차화된(gendered) 공간이다.

이제는 본다는 것이 앎과 이어지고 따라서 푸코적인 의미에서 권력과 결합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 작가다. 보는 것은 단순히 눈에 들어오기 때문에, 다르게 말해 저절로 보이기 때문에 보는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보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보는 주체의 적극적 탐색과 선택, 그 대상을 시각을 통해 앎으로써 그 대상을 길들이고 전유하고자하는 능동적 행위임을 잊지 않는다. 메를로 퐁티의 말을 인용하자면 ‘본다는 것은 거리를 두고 소유하는 것’이다.

물론 백화점에서 쇼핑하며 시간을 보내는 여자들 역시 나름대로 플라네즈인 셈이지만 이제는 구차스런 성차(gender)의 구분이나 위계를 이미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 보들레르가 말하는 플라네르와 완전하게 동격의 존재로서 적극적인 플라네즈라고 할 수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이제는 화가다. 그것도 소위 여성비하적 뉘앙스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단어인 소위 여성화가라는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성차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들어가는 이런 따위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아니 그런 단어들이 때로는 껴안고 때로는 배척하는 이른바 페미니스트 화가도 아니다. 그저 당당한 한사람의 화가다. 본인도 자기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의 시선은 가정, 집으로 대표되어지는 사적 공간 또는 미용실이나 백화점의 여성코너와 같은 소위 여성전용의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때로는 표시가 나게 때로는 눈에 뜨이지 않는 방식으로 성차화(gendered)되어 있는 도시환경에서 이제는 성차를 기준으로 한 이런 사회적 공간구분에 구애받지 않는 플라네즈인 것이다.

그의 시각은 이런 구분을 뛰어넘는다. 아니 무시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꽃병이나 화분이 놓여 져 있는 공간은 여성적인 공간인가? 지금까지 이제가 그린 그림 중 꽃이 등장하는 것은 배달하는 남자가 커다란 꽃다발을 오토바이 뒤에 싣고 달리는 모습을 그린 ‘꽃배달’이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그 그림의 진정한 주제는 오토바이를 타고 꽃배달하는 남자인가. 그의 등 뒤에 놓인 꽃다발인가. 아니면 꽃배달하는 행위인가?

 

이제는 계속 끊임없이 변모하는 서울이라는 메갈로폴리스의 플라네즈로서 자기 자신을 그림 속에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의 작품의 다양한 소재가, 그리고 바로 그 소재의 다양성 자체가 이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플라네르나 플라네즈나 다 같이 새로운 시각적 먹잇감을 찾아 쉴 새 없이 이동하는 존재인 만큼 소재가 그림마다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이 변화하는 소재들을 이제는 능숙하게 다양한 기법으로 그린다.

소재 자체가 다양하고 그 소재를 보는 시각이 각기 색다르고 다양할 때 그 기법이 그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때로는 거의 에로틱하다고 할 정도로 부드럽고 섬세하게, 마치 고운 피부에 화장하듯 특수한 솔이나 부드러운 붓으로 살살 쓰다듬듯 문질러 놓은 것이 있는가 하면 굵고 가는 거친 선들이 마구 엉켜있는 듯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거의 추상 표현주의 작품을 생각나게 하는 그림도 있다. 건축공사장이나 철거현장 주변의 버려진 폐자재더미를 그린 것이다.

바람 부는 황량한 공터 같은 곳을 무심히 스케치하듯 경쾌하게 묘사한 것도 있고 무슨 형태인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붓질만 슬쩍 스쳐간 듯 최소한의 손길만 닿았다고 할 수 있는 그림도 있다. 미묘한 색채의 조합이나 섬세한 붓질의 촉감은 거의 에로틱하다고 할만하다. 그려진 것은 거의 없는 것 같지만 단순히 눈과 손만이 아니라 온몸의 촉감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연하게 흥미 있는 요소를 발견하고 이를 키워서 발전시키거나 이를 바탕으로 상상을 전개시켜나가는 이런 방식은 자동기술이나 발견된 오브제 등 우연을 새로운 착상의 계기로 삼는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업방식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도 있다. <여기1>같은 작품은 그 발상의 기발함 때문에 그들의 콜라주나 데칼코마니 등 다양한 조형적 실험을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두 손이 만들어내는 수수께끼 같은 형태 뒤로 겹쳐 보이는 멀리 가파른 비탈과 그 위에 임시로 설치된 플라스틱 방벽을 보여준다.

성격이 다른 상이한 두 가지 요소의 병치는 그 느닷없는 모양의 만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무슨 신호를 보내듯이 위로 세워 한데 겹쳐진 두 손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의문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맞잡듯 모아진 두 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곧 몇 번 되지 않는 붓질로 이러한 이미지를 박진하게 그려낸 솜씨에 감탄하게 된다. 형태와 색깔 음영 촉감을 한꺼번에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유화기법의 탁월한 유연함을 다시 확인한다. 수묵화를 비롯한 중국화의 경우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의 기본은 바로 이와 같은 효과적인 표현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는 데서 온다. 특히 유화물감은 이에 더해서 물감의 물질성을 촉각적으로 활용하는 독특한 육체적 감각을 제공한다. 아주 짙은 채도의 색조에서 아주 옅은 채도의 색조에 이르는 다채로운 색상과 색조, 농담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 유화기법의 장점이다. 이러한 다양한 활용가능성이 유화적 표현의 다양성과 깊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러한 유화물감을 자기 나름으로 능숙하게 다룬다. 때로는 물감을 엷게 분칠하듯 살짝 붓질한 풍경들은 마치 거의 그려지지 않은 회화성의 미니멀 상태에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착상의 자유스러움이나 다채로운 변화는 어떤 주제를 설정하고 이에 맞추어 그림을 그려나가기보다는 마치 자유스런 추상을 하듯 그저 그려나가는 과정에서 즉흥적으로 발생하기도 하고 또 이미 그려진 어떤 것에서 새로운 어떤 점을 발견하여 이를 발전시키거나 우연한 선들의 얽힘이나 엇갈림, 우연하게 생겨난 형태 또는 질감 등을 사진, 기타 다른 이미지 소스에서 빌려 온 요소들과 결합시키기도 하면서 뜻밖의 놀라운 형상을 만들어나가는 작업방식, 그러니까 그리는 과정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의 효과를 키워나가는 이제 나름의 그림 그리는 방식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자동기술적 작업방식을 생각나게 한다.

동시에 이런 작업방식은 그의 작품이 어떤 특정한 선에서 결정되고 마무리되어 완결된 것으로 보이기보다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는 사람의 해독을 기다리는, 움베르토 에코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열린 작품’으로 보이게 한다. 바로 이러한 점이 다시 회화의 무한하게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면서 저도 모르게 ‘브라보’ 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한편 이제는 이렇게 다양한 소재들을 오가며 다양한 기법을 실험적으로 구사하여 그리면서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을 자기 성찰적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가로서, 그림 그리는 일을 천직으로 선택한 예술가로서.

 

유화란 무엇인가? 회화란 무엇인가?

그린다는 건 무엇인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이런 질문들을 유독 그만이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제는 개념미술을 하는 작가들이 그래왔듯이 언어적 형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리는 행위에 의해 구체적으로 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그 자체로 반성적이고 실험적이다. 반성적 실험적이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에서 그렇다. 이러한 작가의 심경과 태도가 유화의 형태로 가시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반갑다. 쉽게 말하자면 무엇을 그린다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 시각적 경험의 세계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리는 행위 자체가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의 메타 행위이고 새로운 시각적 질문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 자꾸 새롭게 그려보고 그렇게 해서 생겨난 형상들을 자기 것으로 길들이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그림 그리는 일의 즐거움이 아닌가.

 

어떤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캔버스에 물감으로 어떤 정경을 그려서 보여준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그리고자 하는 것 또는 그림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이었던가. 우리가 기억 속 어딘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이미지는 과연 그림으로 그려서 살려낼 수 있는 것인가. 꿈의 한 장면이나 물밑 풍경을 그린 것 같은 거의 추상화에 가까운 이미지는 구상과 추상의 두 영역을 마치 그 사이에 아무런 경계도 없는 것처럼 자유스럽게 넘나드는 경쾌한 붓질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그린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메타 회화적 질문이 그려진 이미지와 동반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기억의 이미지, 직접 보고 체험하는 이미지, 캔버스 위에 전혀 새롭게 형성되는 이미지, 머릿속에서 상상하여 만들어내는 이미지, 사진이나 텔레비전 또는 영화를 보고 체험하는 이미지, 유명한 걸작 그림들을 포함하여 화집이나 미술관에서 본 그림의 이미지, 복제 도판, 인쇄된 광고, 인터넷스크린에서 본 이미지, 뉴미디어로 새롭게 인공적으로 합성한 이미지, 그것들은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것일까.

유화로 그리는 일은 이런 혼란스런 이미지의 세계를 어떻게 소화해낼 수 있을까. 그것을 다시 그릴 가치가 있기는 있는 걸까. 그릴만한 가치 있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볼만하게 그리는 것은 과연 어떻게 그리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그리는 것은 보기 좋은 것인가.

보기 좋다는 게 과연 뭐지.

본능적으로 흥겹게 춤을 추듯이 그림도 흥겹게 그릴 수 있는 걸까. 아니면 공들여 꼼꼼하게 무언가 짜 맞추거나 쌓아가듯이 그려야 하는 걸까.

 

그림 그리는 것도 시를 쓰거나 노래 부르거나 춤추는 것과 마찬가지로만 살짝 미쳐야만 잘 되는 일이 아닌가. 아주 미치지는 말고 자신이 컨트롤할 수 있는 정도에서, 살짝 미친 상태에서 잘 되는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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