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 이제

Heat wave / Leeje

사람들은 일상을 담는 예술에서 보통 ‘살만하다고 느끼는 순간들’, 그 찰나의 여유나 평화로움을 기대한다. 보통의 풍경 뒤에 설명할 수 없이 복잡한 불쾌함들이 깔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소소한 위로를 그림을 통해 가끔씩 얻고 표현한다. 그러나 요즘은, 삶에서 그런 위로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느낌이 든다. 원전사태와 세월호, 씽크홀, 대량실업의 나날들... 긴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 국가적 시스템은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한다. 내 옆에 존재하는 주변 사람들만이 아직 살아있음과 함께 살아내고 있음을 확인시켜줄 뿐, 이미 시간은 한 배 속에서 멈추어 가라앉기 시작한지 오래다. 재난을 재현한 그림들이 오랫동안 불편했고 여전히 내 바램은 환타지 가득한 ‘예술’과 ‘그림’이란 존재를 지옥 같은 현실과 함께 두고 싶지 않지만, 재난과 막장이 일상이 되어버린 지금 내 눈은 둘 곳이 없다. 내 몸과 마음은 그릴 것을 잃었다.

 

얼마 전 우연히 들린 한 교회에서 ‘온유’를 주제로 한 설교를 듣게 되었다. 아주 주관적으로 들었는데, 기억나는 이야기는 이렇다. 내면을 다스리는 질서 속에 생기는 것이 ‘온유’의 상태인데, 그 ‘온유’로 원초적 힘을 누르고 자신을 다스리면 주어진 일을 수행해나갈 힘이 생긴다는 내용이 솔깃했다. 무엇보다 ‘온유’는 원초적 힘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의 힘을 이용해 주어진 일을 수행케 도와준다는 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온유’야 말로 여기, 지금의 난국을 뚫는 중요한 감각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시 제목은 <폭염>이다. 폭염처럼 불쾌하고 무기력한 일상의 풍경들을 최대한 ‘온유’의 마음으로! 나열해 보았다. 이곳의 비참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맡은 자리를 지키며 나름의 미래를 그리겠다는 삶의 의지를 드러내고 싶었다. 폭력적인 일상을 담담하게 바라보고 연민으로 살아가자는 설명을 붙이면 너무 거창한걸까? 내가 느끼고 보는 이 세계가 하루하루 형용할 수 없이 무자비하니, 그걸 대면하는 나의 심정도 거창할 수 밖에. 전시를 준비하면서 깨진 거울의 형상이 떠올랐다. 각각의 풍경을 비추는 조각들이 쌓여 만들어낸, 그런 전체의 풍경을 생각하며 그렸다. 그리고 그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그래야, 나도 계속 그릴 수 있고, 그림도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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