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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는 것, 잘 그리는 것, 잘 말하는 것 / 박지수

See Right, Paint Right, Talk Right / Jisoo Park
 

아이는 보기 위해 움직인다. 강아지를 보면 코앞까지 다가간다. 개미가 움직이면 쭈그려 앉는다. 손에 든 자동차 장난감을 제자리에 가만히 놓고 바닥에 얼굴을 괸 채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한다. 이처럼 보기 위해 눈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아이의 세계는 시시각각 분주하다.

반면 어른은 보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강아지도, 개미도, 자동차 장난감도 이미 다 알고 있기에 움직이지 않는다. 다만 거리가 너무 멀어 대상이 어렴풋하게 보일 때는 가끔 움직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알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에 가깝다. 대상이 무엇이라고 인지되면, 그 자리에서 눈길과 발길을 멈추기 때문이다. 대상이 무엇인지 아는 순간 보는 것을 멈추는 어른은 점점 아는 것만 보게 된다. 때로 그들이 봤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아는 것들을 조합한 내용일 경우가 많다. 바꿔 말하면 알지 못하는 것을 보지 않으며, 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아는지 모르는지가 중요하지 않은 아이는 어른보다 더 많은 것을 보며, 그것에 관해 쉴 새 없이 떠든다. 또한, 매번 모르는 것까지 말하려고 손과 발을 써가며 부단히 애쓴다. 아이는 한껏 자신이 본 것들을 목소리에 꾹꾹 담는다. 그 목소리는 비록 공기 중에 사라지만, 엄연히 자신의 본 것을 기록한 언어인 셈이다. 아는 것이 많아져 더 이상 눈을 따라 움직이지 않을 때 아이는 그 목소리를 잃고 어른이 된다.

 

이제의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그림을 보았다. 이제의 그림에는 너무나 많은 세상이 있었고, 각각의 그림들은 자기가 담은 세상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의 그림은 세상을 잘 그리려는 욕심만큼이나 세상을 잘 바라보려는 욕망이 강해 보였다. 계속 보고 있자니 눈을 따라 움직이는 내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산동네의 아파트에서 황량한 재개발 풍경,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오토바이 아저씨, 티셔츠를 들어올려 가슴을 내보이는 여인, 에어컨을 고치는 아저씨의 터질 것 같은 종아리, 작업실 창문으로 보이는 축대와 화분 그리고 주위를 돌아다니는 고양이, 의자에 앉거나 뒤돌아보는 지인들, 제주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둥그런 토기까지. 이제의 그림이 바라보는 세상은, 솔직히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넓었다. 그러나 본 것을 말하려 애쓰는 내 아이의 목소리처럼 그림들은 본 것을 잘 담고자 몰두하고 있었다.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형태, 때로는 아주 두텁게 때로는 아주 엷은 터치, 밝고 투명하다가도 갑자기 어둡고 탁해지는 색감 등의 다양한 궤적은 보는 대상에 따라 코앞까지 가거나 납작 엎드리는 아이의 움직임과 닮아 있었다. 그리기 위해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충실히 그려내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는 인상을 그림마다 강하게 받았다.

다시 말해 이야기에 맞춰 그림을 그리고, 그림에 맞는 대상을 골라서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이 본 것에 시시각각 반응하며 열린 상태로 그리기가 진행되는 듯했다. 이러한 방식은 그림이 거듭될수록 내용과 형식 그리고 대상을 좁혀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번 다른 대상을 다시 새롭게 바라봐야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대상이 무엇이든 보기가 그리기로 전이되고, 그 과정을 거친 그림이 파편적인 이야기로 발화되는 것을 조마조마하게 기다려야만 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방식은 이른바 작업의 일관성이라는 순도를 높이기엔 불리할지 모르나, 적어도 자신의 이야기에 갇힌 그리기/보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야기에 맞춰 세상을 재단하거나 대상을 끼워넣지 않고, 자기 이야기에 갇혀 손과 눈이 닫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것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이제의 눈과 손은 다르게 움직일 것이 분명하다. 그 움직임의 풍부함에 따라 이야기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발화될 것이다. 마치 아이의 목소리처럼.

아이는 식탁에 앉아서도 또 무언가를 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씩 입으로 옮긴다. “미역, 김, 조개, 오징어, 문어, 돌고래, 샤크…. 친-구” 아이의 말에 허를 찔린 기분이 된 나는, 아이가 보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세상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는 식탁에서 바다를 본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상상한다. 자신이 본 것을 모두 담고 있는 아이의 목소리는 열린 이야기를 향한다.

 

나는 식탁에 앉은 아이처럼 이제의 그림을 보려고 노력해본다. 그리고 천천히 입으로 옮겨본다. “한숨과 검은 구멍, 토기와 둥그런 가슴들, 굵고 억센 손, 축대의 뭉개진 디테일, 화분을 빠져나온 식물, 축대 앞에서 사료를 먹는 삼색 고양이, 바람에 흩어지는 바다와 풀들, 손을 숨기고 있는 여인과 손목을 비틀고 있는 여인, 뒤돌아보는 세 여인들 ….” 여전히 종잡을 수 없지만, 이제의 그림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선 것처럼 느낀다. 당연하게도 그 그림들 또한 물리적인 세상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화될 열린 이야기들간을 상상하니 왠지 모르게 잃어버렸던 아이의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착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My child keeps moving to see. When he finds a puppy, he steps closer to it, face to face. When ants move, he sits down. When it comes to the toy car in his hand, he puts the car down, lie with his face down to observe it intensely. As such, his world is ever busy with moving the body in synchronization with his eyes.

In comparison, adults don’t move to see, because they already know the puppy, the ants and the toy car. Only when the object is too far or too vague, they would move around. But even this act is rather made to learn what it is, but not to see it actually. When an object is recognized as something, adults’ steps and sights suspend there, where they are. Because the adults stop seeing when they recognize an object and what they see gets more and more confined to what they know. At times, when they tell what they saw, often it only corresponds to the combination of what they know. In other words, they don’t see or intend to say what they don’t know. In contrast, to children, it is not important whether they know it or not, thus they see more and talk about it without break. Moreover, they are eager to tell things that they even don’t know, gesticulating with their hands and feet. Children compress all that they saw into their voice. The voice disappears in the air, but it is a language recording the integrity of what they saw. As they gain knowledge and stop moving their body following what they see, they lose this voice and grow up.

Sitting next to each other in front of Leeje’s computer, we went through many images over a short amount of time. In Leeje’s painting, there were numerous worlds, and each of them conveyed thoroughly what she saw. Her paintings seemed to be eager to see the world right, as strong as the desire to paint it right. As I kept looking at them, it reminded me of my child moving toward what he saw.

From a housing complex in the mountains, a bleak landscape of redevelopment, trees shaken by wind, an uncle riding motorbike, a woman exposing her breast holding up her t-shirt, hard calves of the guy repairing broken air conditioner, embankment, vases and the wandering cat visible from her studio window, acquaintances sitting or looking back to the round pottery that the artist baked in Jeju – to be honest, the world captured in Leeje’s painting ranges in a broad diversity that is hard to circumscribe. Yet they are preoccupied with conveying what she saw as entirely as possible, like how my child would strive to encapsulate what he saw. Forms that organically oscillate between the figurative and the abstract, touches, heavy at times but soft at others, transiting from bright and translucent to dark and opaque – the results on her canvas are similar to ones left from a child’s movement, who approaches the object as close as right before his eyes or lie down flat to see it better. Each of Leeje’s paintings gave me a strong impression of a hand in constant movement to thoroughly depict what she saw, instead of staring at the object with the intention to depict it.

In other words, instead of visualizing a predetermined narrative or selectively perceiving the object to be depicted, Leeje’s act of painting seems to be executed on an open state, based on which the artist can stay awake around what she paints. This method will be only possible when the painter will perceive the object anew each time as the piece progresses, rather than narrowing down the perspective toward the content, form and object of painting. And no matter what the object could be, the act might keep the artist anxiously waiting for the fragmented narrative of the image resulted from the process of transferring the acts of seeing to that of painting. This method might not be adequate for focusedly crystallizing the essence of the work, yet frees the artist from being confined to the ways of seeing and painting within a defined narrative. This choice doesn’t edit the world or crop the object to fit the narrative nor seals the hands and the eyes of the artist into the trap of her own narrative. Depending on what Leeje saw and how she decides to react to it, her hands and eyes are destined to react differently each time. Reflecting the amplitude of the movement, the narrative will be articulated through new possibilities, like the voice of a child.

The child stares at something again, even sitting at table. He translates each of the things verbalized through his mouth: “seaweed, laver, clam, squid, octopus, dolphin, shark… And fri---ends.” This flow strikes me and leads me to the realization that what he sees is not restrained to the physical world. Indeed, he saw ocean on the table. And he imagined the relation of the things on it and not on it. His voice directs to an open story containing everything that he saw.

I attempt to see Leeje’s painting like my child at table. And slowly, I verbalize things I see: “a sigh and dark gaps, pottery and round breasts, strong and rough hands, blurred details of the stone wall, plants escaping from vases, a tricolored cat eating food in front of the embankment, the ocean and grass dispersed by the wind, a woman hiding her hand and another woman twisting her wrist, three women looking back…” It is still confusing, yet I do feel closer to Leeje’s painting. Naturally, I also realize that the images don’t need to be restrained to the physical world either. And as I start to imagine the open narratives that are being articulated in there, it feels as if I could regain the lost voice of me as a child. This illusion absorbs me.

박지수 / 소설을 쓰려고 국어국문학과에 갔다가 소설을 포기했고, 사진작업을 하려고 사진학과에 갔다가 사진작업을 포기했다. 줄곧 사진잡지사에서 마감에 시달리며 사진과 글을 찾고 고르고 다듬는 일을 해오고 있다.

Jisoo Park studied Korean literature yet eventually quit on writing novels and continued with studying photography, to quit again with making it. Since then, she works for a photography magazine, repeating deadlines of searching, selecting and polishing texts and photograp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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