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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숨 / 함성언

Low breath / Sung-un Hamm

어려서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토끼를 잡(아먹)거나 싸릿대로 개구리를 휘갈기며 놀던 내게, 서울의 공원은 아직도 불편하다. 그럴 듯 하게 개울도 만들고, 잔뜩 나무도 심어 놓았지만 내가 알던 ‘자연’이란 것은 길도 없고, 말끔한 잔디도 없으며, 가끔은 그늘이 너무 깊어 무섭기도 한 존재다. 공원을 만드는 게 잘못되었다거나 딱히 싫은 것도 아닌데 굳이 거길 가서 자리를 펴고 앉아있을 생각은 들지 않는다. 도시의 공원은 제대로 흉내 낸 자연도 아니고, 그럴 이유도 없는 완전히 다른 생태계처럼 보인다.

 

이제의 작업실은 연남동을 가로지르던 철길을 따라 새로 만들어진 공원의 제일 끄트머리께 있다. 안정적이고 정돈된 공원에서 직선거리로 몇 백 미터도 채 되지 않을 곳에는 꽤 오래된 주택가가 있다. 작가의 뒤를 따라 걷는 내내 재개발 되기 전 큰아버지 댁에 놀러 가던 국민학생의 내가 기억났다. 큰아버지 댁도 그랬다. 멀쩡한 큰 길이 있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딱히 시골 살던 우리 동네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 여기가 말로 듣던 서울인가, 서울이 뭐 이런가 싶던 골목. 금성 칼라TV로 보던 그 많은 차들과 빌딩은 다 어디 가고, 연탄재가 뒹구는 모양이 딱 나 살던 동네와 닮았던 골목길.

 

이제의 작업실로 가는 길이 그렇게 느껴진 건 분명 공원 탓이었다. 미용이 잘 된 개들이 뛰어 놀고, 개울에 발벗고 들어가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에게 엄마는 질색을 하고, 예쁘게 차려 입은 연인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그 공원 말이다. 딱히 진짜 ‘자연’을 제대로 흉내 내려는 의지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도시에 최적화된 그 공원 말이다. 소나무 그늘은 시원하지도 않은데 굳이 기다란 소나무를 심어 놓고, 하수처리장에서 정수된 물을 흘려 보내놓고 그 옆으로 일일이 손으로 물풀까지 심어 놓았을 개울까지 만들어 놓은 그 공원 말이다.

 

동네 사람들에게야 집 값 올라가는 풍경이고, 심심할 때 맥주 한 잔 하기 좋은 풍경이고, 강아지 데리고 나와 산책하거나 놀 곳 없는 애기들을 데리고 나오기 좋은 풍경이겠지만, 나는 그게 참 묘하게 보였다. 공원 하나 만들어 놓았다고 집 값이 오르는 세상도 묘하고, 오른 월세를 감수하고 그 옆에 카페를 내는 사람들도 묘했다. 결국 그들은 오른 집 값 때문에 오랫동안 살던 동네를 떠나야 하는 날이 올 것이고, 새로 생긴 카페는 권리금이나 조금 받아 겨우 빚잔치를 면해 다른 동네로 옮겨야 할 것이다. 조금 살아보니 세상이 그렇다.

 

만들어진 무엇인가는, 특히 가짜로 만들어진 무엇인가는 대가를 요구한다.

그걸 모르면 결국 사회 구조와 그 작동원리에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매몰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그리고 그 전형에 살고 있는 이제의 작품들이다.

터지기 직전의 긴장감을 본다. 혹은 애잔함과 연민을 본다. 아니, 숯불처럼 속으로 타는 분노를 본다. 그러고 보면 애잔함이나 연민 같은 것은 차라리 희망적이다. 대놓고 땅 속으로 꺼져버린 도로와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보이기도 하고, 그 안에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작가의 절망과 무력함이 보이기도 한다. 1년 전 <온기>였던 개인전의 제목은 이번엔 <폭염>이 되었다. 이건 숫제 타고 있거나 태우고 있는 속내다. 작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만약 그가 80년대 대학을 다녔다면 신학철이나 오윤 같은 그림을 그렸거나 <타는 목마름으로> 같은 시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 때는 세상이 사람들을 그렇게 몰아갔다고 몇 년 위 대학 선배들이 말했었다.

 

미끈하고 정돈된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다. 100층이 넘는 건물이 쑥쑥 올라가고, 비싼 캠핑 장비들은 종종 품절 상태며, 새로 나온 대형차는 하루에 1,000대씩 계약이 된다고 뉴스에 나온다. 성북동엔 카페며 식당이 생겨나고 있지만, 4년 전 계약한 갤러리 건물 주인은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월세를 올려 달라고 말하고, 벌써 주변의 다른 가게들은 자리를 털고 이사를 갔다. 100층 넘는 건물 주변으로는 블랙홀처럼 싱크홀이 생겨 차들이 사라진다. 이건 마치 철길을 따라 만들어진 연남동의 공원 같다. 공원을 애칭처럼 부르는 ‘연트럴 파크’도 뉴욕 ‘센트럴 파크’를 따라 만들어진 이름이다. 정돈돼 보기 좋고, 절묘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름부터 실체까지 가짜다. 결국 우리는 그 안에 매몰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언저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몸과 마음은 그릴 것을 잃었다”는 이제가 무엇을 그리는지를 제대로 살펴 봐야 한다. 문득 모로 누워 잠이 든 소녀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떠올린다. 불타오르는 캔버스와 도로 한복판에 생겨난 싱크홀, 콘크리트 덩어리일 어느 건물의 잔해와는 사뭇 다른 풍경. 잠든 소녀에게는 어떤 분노나 절망, 무력감도 보이지 않는다. 손자국이 찍힌 장미꽃밭을 넘어 흩뿌려진 물감과 분명 언제든 생겨날 수 있는 매끈하지 않은 풍경들 사이로, 소녀는 쉼표처럼 숨 쉴 틈이 된다. 흡, 하고 들여 마시는 숨은 맥박을 느리게 하고 눈에 들어간 힘을 빼준다. 어쩌면 잠든 소녀는 이제의 다른 모습, 혹은 이제가 되고 싶은 이제의 자화상일 수도 있겠다. 근육에 피가 들어차 팽팽해진 상태를 이완시키는, 그래서 분노와 절망과 무력감이 중화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작품 속 이미지가 던지는 거친 질문의 답이 거기 있을 수도 있다.

 

주먹 쥔 손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고 달려가 가짜가 만든 풍경과 뒤엉켜 싸우는 순간, 승자가 되건 패자가 되건 우리도 별 수 없이 그 풍경의 일부가 된다. 낮은 시선과 숨으로 나를 평온하게 하는 것. 폭염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시간이 지나며 자연은 잠시 숨 고르기를 한다.

 

그래. 이제는 지금 심호흡을 권한다.

조용히 내쉬는 숨으로 견디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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