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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이제*이솝2인전 리뷰 / 공성훈

나는 너를 놓지 않는다 : 이제 / 이솝 2인전 (2010.06.11 –07.11 대안공간 풀)

 

천장과 내벽의 마감재를 다 뜯어내 서까래와 기둥이 다 드러나고 거친 콘크리트, 낡은 타일과 붉은 벽돌의 벽면에 군데군데 보수의 흔적이 남아있는 대안공간 풀의 전시장. 흡사 살이 뜯기고 썩어가며 뼈를 드러내고 있는 거대한 동물의 잔해 속에 들어선 기분이었는데 두 여성 작가의 작품들마저도 그 잔해의 일부로 보였다. 불활성(不活性)의 색채가 얇게 발라진 이제의 그림들은 마치 점막(粘膜)이나 변색된 속살처럼, 점액(粘液)과도 같은 레진이 흘러내리는 이솝의 조각들은 신체없는 장기(臟器)처럼.

이제의 그림들은 “대책 없이 되풀이되는 불안, 무기력함, 피곤함, 상실감 자체를 선명하게 구체화하고 마주하기”라고 한다. 도시 재개발이 쓸어간 개인적 추억의 상실과 무력감. 철거중인 건물 내부에 각목으로 만든 가벽처럼 설치된 <너의 노래, 지혜>는 웃옷을 들추고 가슴을 보여준다. 배 째라? 다 보여주마? 배경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신경질적으로 날카로운 녹슨 철근더미에 무방비로 노출된 젖꼭지. 그건 포크레인이 부숴버린 콘크리트 폐기물 더미 속에서 내밀고 있는 <너의 노래, 수자>의 혀와 같다. 예민하고 다치기 쉬운 점막. 아무래도 굳은살이 배기기는 힘들다. 일인용 소파에 그라비아 화보 모델처럼 늘어져 있는 <너의 노래, 민경>의 아랫배 부분에는 칼날의 궤적 같은 햇살이 지나간다.

우리는 맞설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종종 상처받게 되는데, 사실 진정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것은 그 힘이 배려를 가장할 때이다. 약자에게 동시에 주어지는 사랑의 말과 폭력의 몸짓. 모순된 메시지가 불러일으키는 ‘이중구속(Double-bind, Gregory Bateson이 정신분열증의 원인으로 설명한 용어)’의 상황. 이제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개발과 진보일 것이다. 이솝의 <회저의 웃음>도 같은 맥락인데 여기에서는 제스츄어 대신 이빨이 매달린 타워 크레인이라는 부조리한 괴물의 알레고리가 등장한다.

녹슨 철사더미를 그린 듯한 이제의 <더미>는 이솝의 다른 조각작품들과 연결되는 고리로 보인다. 그 그림은 마치 수채구멍에 뭉쳐진 노인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과 음모처럼, 우리가 하수구나 변기 속으로 흘려버려야 하는 어떤 것, 그러나 철망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어떤 것을 연상시킨다. 아마 혼돈과 죽음의 세계, 이드(id)의 세계로부터 잊을 만 하면 불현듯 이쪽으로 출몰하는 것일 게다. 저편의 세계에서 솟아나온 듯한 해골, 썩은 살점과 혈관 또는 기이한 나무, 비둘기 박제, 두상, 조화, 굳어버린 점액 등이 불안정한 형태로 그로테스크하게 조합된 이솝의 <과대망상>, <구원불가능>, <상실의 시대>는 “개체들의 관계 맺음에서 생성된 오류와 환상의 과도한 성장”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앞에서 말한 ‘이중구속’의 상황이 (가족을 포함한) 타인과의 의사소통에서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사실, 우리는 현실 그대로의 공간에 사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질서 속에서 자리매김하고 살아간다는 사실, 그 상징적 공간 내에서 자신의 자리가 손상되면 현실이 해체되어 버린다는 사실, 붕괴된 현실은 악몽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제, 이솝은 그러나, 비관 속에서 자폐적이고 유아적인 판타지에 고착되어 있지는 않다. 이제의 그림 속 젊은 여성들은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한다. 그럼으로써 경쾌한 붓질과 함께 황량한 현실풍경의 중압감을 별 것 아니게 만들고 이윽고 <섬의 가능성>, <옥수 13구역> 등에서 시적 서정성에 다다른다. ‘우린 강철같은 근육은 없지만 민감한 점막이 있잖아’하고 속삭인다. 8개월 동안 인터넷 채팅 사이트에서 대화를 나눈 남성들의 정액을 모은 <관능의 자서전>에 덧붙인 자작시에서 이솝은, 정액의 입을 빌어, 욕망(=판타지)의 허망함을 말한다. 그리고 우레탄, 레진, 스티로폼, 유토, 조화, 석고, 실, 각목 등의 싸구려 재료들은 그녀의 조각이 숭고한 토템폴(Totem Pole)로 보이는 것을 방해한다. 결국 이솝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맺기의 오류에 대해서 초의사소통(meta-communication)하고 있는 것이다.

 

2010년 7월 / 공성훈(작가, 성균관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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