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한 지각과 이제 그림의 배경설명 / 박찬경

개인전‘풍경의 시작’, 대안공간 루프, 2006

회화의 가치 또는 임무는, 내가 아는 한 메를로-퐁티에 의해 가장 간명한 언어로, 또 감동적으로 설명되었다.

 

내 친구 한 사람과 내가 어떤 풍경 앞에 서 있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나는 보았는데 내 친구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을 내가 그에게 일러주려 한다고 해봅시다. 이 때 나는 내 자신의 세계 속에서 어떤 것을 보고 언어적인 메시지를 통해서 내 친구의 세계 속에서 비슷한 지각을 일어나게 할 생각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그 문제를 설명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수적으로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있고 거기에 덧붙여 유일하게 우리를 결합시켜주는 매개적인 언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본 것이 그 친구에 의해서도 또한 보여져야한다는 일종의 요구-그 친구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나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게 되는 일로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교류는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바로 그 사물, 그 사물 위에서 일어나는 햇빛의 반사, 그것의 색깔, 그것의 감각적인 명증성에 의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물은 그 자신을 모든 지성 앞에 진실한 것으로서 내맡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현존하고 있는 곳에 서 있는 모든 주관에 대해 실재로서 내 맡기고 있는 것입니다. (현상학과 예술, 메를로-퐁티, 오병남 옮김, 서광사, 64쪽)

 

인용한 글에서 ‘나’를 화가로 대입하여 읽어 볼 수 있다. 그렇게 읽어보자면, 화가는 사물에 반응한 심리의 변화나 사물에 대해 생각한 논리적 결과가 아니라, 대상과 통일된 지각의 명증성을 드러내야한다. 아직 젊은 작가인 이제의 그림이, 여기서 말하는 현존성이나 감각적인 명증성을 다 갖추고 있다고 말하기는 뭣하겠다. 그러나 이제의 그림들이 목표로 삼는 것도 이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고, 몇 몇 그림에서는 그 충분한 성취가능성을 보게 된다. ‘개나리 전망대’와 ‘남산의 아침’, 그리고 ‘난지캠프장’이 그런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에는 미화(美化)될 권리가 있는 일상의 장면들, 실재생활 속에 있는 이상향적인 순간이 생생하게 나타난다.

 

내 주된 관심은 ‘이런 그림들’이 과연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이 밝혀지지 않고서는, 아직 성장의 과정에 있는 작가의 잠재력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고, 앞으로의 갈 길도 막막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회화의 위기 내지 죽음 담론을 돌파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위 인용문을 빌어 말하자면, 한국 사람들은 눈앞의 풍경을 충분히 보는 대신에 핸드폰카메라부터 꺼내들 것이고, 그 자리에서 친구에게 사진이미지를 전송할 것이다. 문제는 화가의 성취를 성취로서 인식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기초, 자신이 본 것을 전했을 때 성공하리라는 일말의 기대, 한발 더 나아가 현존의 체험 자체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분열적이며 빠르고 쉬우면서도 강렬한 이미지 중독사회에서 이에 대한 답은 회의적이다. 미술계 안에서조차 민정기나 최진욱의 그림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모니터와 스크린이 그림으로부터 관객을 빼앗아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아직 정치한 논리를 짜지는 못하겠지만, 문화이론보다 사회평론이 그 이유, 즉 ‘리얼한 지각의 상실’의 이유를 더 잘 설명해준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한국사회에 팽배한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문화, 개발주의의 폭력과 개발의 속도, 냉전 이데올로기, 종교적 광기, 지역 및 집단이기주의, 황금만능주의, 황색 저널리즘 등 ‘정상적’ 시민사회와 문화의 부재가 오히려 회화의 위기와 직결된다. ‘직결된다’는 말은 말 그대로, 어떤 추상적인 매개를 거치거나 그것을 배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똑같은 현장에서 행위를 주고받고 동시에 벌어진다는 뜻이다. 물론 ‘정상적’ 시민문화가 존재하는 서구사회에서도 ‘리얼한 지각의 상실’이 있을 것이며, 예술이 이에 맞서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정상적/비정상적’이라는 구분은 단순히 강도의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이다. ‘비근대화된 탈근대사회’의 실제 내용(흔히 말하는 ‘삶의 질’)은 서구 제도의 틀과 항목들에 정도 차이를 대입함으로써는,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어떤 지적 고찰의 엔터티(entity 자립적 실체)로서 ‘한국사회’라는 틀은 따라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며, 회화의 가치도 한국사회의 주름을 타고 설명됨으로서 수많은 허구적인 담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우리 미술사나 비평자체가 이 주름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고 있다고 봐야한다.

 

위에 나열한 한국사회의 특징은, 더 단순하게 줄여 말하면 남(소위 ‘타자’)에 대한 배려와 윤리, 공동선과 인간적 유대의 전반적인 부재를 뜻한다. 자유의 관념만 있고, 평등과 박애는 뒷전이다.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우선한다. 독백만 있고 대화가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독특한 한국적 자유민주주의 사회와 그림의 연관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칠게 도식화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1. 실재 공간에 참여하여 통감각적으로 보지 않는다.

2.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3. 보는 행위(또는 지각) 속에 깃든 인간 상호적인 가치를 모른다.

4. 내 체험에 타인의 참여를 기대하지 않는다.

5. 보는 눈이 퇴보하고 받아들이는 눈만 발달한다.

6. 사물과 세계, 사회로부터 물러나 텅 빈 ‘개인’의 포장 속에 안주한다.

 

위의 항목 가운데 3번이 나머지를 이해하는데 관건이다. 이에 대해서 다시 메를로-퐁티는 말한다.

 

내가 타인을 지각하는데 있어서 나는 “또 다른 자아”-원칙적으로 내게 열려있는 동일한 진리들에 열려 있고, 내게 관련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진리들에 열려있고, 내게 관련되고 있는 것과 동일한 존재에 관련되고 있는 그러한 또 다른 자아 - 와의 관계 속에 나 자신이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라고. ...(중략)... 세계에 대한 나의 모든 파악 체계로서의 나의 신체가 내가 지각하고 있는 대상들의 통일성의 기초를 이루어 놓고 있듯,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타인의 신체-상징적 행위의 담지자로서 그리고 진실한 실재의 행위의 담지자로서의 신체-는 나의 여러 가지 현상들 중의 하나가 되는 입장으로부터 그 자신을 떼어 내어 진정한 교류의 임무를 내게 제시하고, 그래서 나의 대상들에 상호주관적인 존재의 차원, 달리 말하자면 새로운 객관성의 차원을 수여합니다. 요약하건대, 이상의 사실들이야말로 지각된 세계를 기술하는 데 따르는 요소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현상학과 예술, 메를로-퐁티, 오병남 옮김, 서광사, 64쪽)

 

이러한 상호주관성은 지각의 기본적인 조건이므로 누구에게나 언제나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러나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고, 실제로도 왜곡되기 때문에 예술의 임무가 생긴다고 볼 수 있다. 메를로-퐁띠는 계속해서, ‘그냥 내버려두면 지각은 자신을 망각하고 그 자신이 수행한 결과를 모르게 된다.’ 또 ‘지각에 있어서 진실인 것은 역시 지성의 단계에서도 진실이다.’ 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우승열패의 사회, 미디어 중독사회는 지각이 자신을 완전히 망각하는 단계에 이른 사회이기도하다. 이 사회의 특징은, 반성이 없다는 것이고, 그 중에서도 특히 상호주관적 존재와 가치에 대한 반성이 결여된 것이다.

 

물론 나는 지각에 관한 통찰을 사회적 가치나 제도, 우리사회의 특수성과 무리하게 연결하였다. 메를로-퐁티의 말들이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되었을 것이고, ‘전문’ 미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리얼한 지각과 회화의 가치를 동일시하려면 긴 논증이 필요하다. 또 상호주관성은 그 자체로는 사회적 유대감과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사회학자나 미학자 모두의 입장에서 황당한 논리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내 질문은, 그런데 ‘화가에게도 그럴까?’ 이다. 리얼한 순간을 사람들에게 환기하고자하는 화가의 마음 속에, 그림을 매개로한 인간 사이의 유대, 공동선의 추구가 없을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매우 강렬한 나머지, 때로 지각 자체를 변형시키며 따라서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삶의 체험’이란 것이 우리 모두에게 아직 남아있다면,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순간들은 들여다볼수록 미묘한 의미들로 충만해야한다. 천민문화가 지배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순금純金의 순간’은 사람들의 의지 깊은 곳에서부터 거의 사라지고 있다. 리얼한 지각을 추구하는 화가들은, 아이들의 내신성적을 관리하는 미술학원에서부터 죽어가고 있다. 바로 이런것이 우리사회가 특수한 방식으로 미술을 말살하는 ‘주름’이다. 또 바로 이런 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회화가 더 긴급한 이유이다.

메를로-퐁티는 지각은 그냥 내버려두면 자신을 망각한다고 했다. 지금 우리는 그냥 내버려두는 정도가 아니라 매번 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여전히 이중성이 있다. 지각은 망각될 뿐이지 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화가의 답변은 간단하다. 회화의 체험이 ‘거의’ 불가능할 뿐이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이다. 회화의 가치를 주관과 주관 사이에 교류의 근원적인 조건으로서, 즉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사실 아무도 회화의 링 주변을 떠나지 않은 것이 된다. 떠난 것처럼 되었을 뿐이다. 샤갈전이 ‘대박’을 터뜨린 것은 허구적인 예술신화가 작동한 탓이나, 그림에 대한 막연한 기억, 즉 ‘햇빛의 반사, 그것의 색깔, 그것의 명증성’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가 그 대상을 잘못 찾은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만약 회화가 주체와 세계의 현존성을 환기하는 가장 보편적이며 막강한 기술이라면, 사실 회화의 가치를 논리적으로 증명할 필요는 별로 없다. 그림이 그것을 보여주면 되니까.

그것을 보여주는 회화를, 최근 우리 회화의 트렌트와 대비하여 말하자면 - 사사로운 일상으로의 후퇴가 아니라 일상에 대한 새로운 객관성으로의 전진이며, 폐쇄된 자기애가 아니라 관계의 심원함 속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다. 고립된 화가들이 자주 빠지는 잘못이 바로 이러한 후퇴와 나르시시즘, 나아가 ‘외부인’ 화가에 대한 동정심을 상품화하는 것인데 비해, 작가 이제는 그렇지 않은 것만으로도 상당한 미덕을 갖췄다. 이제의 전시 서문에 정작 이제 작품에 대해서는 별 얘기를 못해 미안하다. 그러나 이 글은 소위 ‘주례사’ 정도가 아니라, 이제에 대한 기대가 깔린, 실은 엄청난 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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