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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nger than Paradise

백은선 2019
 

견디는 것

끝없이 움직이지만 결국 돌고 있을 뿐인 순환의 기이한 시스템
밀실 밀실
피의 리듬 

아무리 움직여도 원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나요?
뿌리를 잊는 파도의 마음으로 
불가사의한 흙더미 주무르는 커다란 손들
연결

서로의 손목을 나눠가지는 아름다운 태도로

얼굴과 얼굴들 얼굴 사이 틈틈 비추는 빛과 어둠 사이 격렬하고도 다정한 경계의 심연 그걸 우리는 사랑이라고 이동이라고 슬픔이라고 안도라고 쉽게 부르고 낭만화하고 이론화하고 도식화하고 그리고 페이지를 넘겨버린다면 넘어간 페이지 속에서 눈 부릅뜬 수백의 얼굴이 영영 어둠을 읽고 있다면 그런 낮과 밤을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지 차마 알 수 없어서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없는 채로 손상되지 않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불안과 책임 안에서…… 아름다움을 알게 된 후에는 아름다움을 발설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 먼 나무들의 행진 어둠 속에서만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내통하는 파도의 조율 그런 리듬을 목격했다고 말한다면 안개 속에서 스치듯 보았어요 확신할 수 없어요 그렇지만 아름다워 도저히 모를 수 없었다고 말한다면

파도를 불러일으키는 달의 자세로

하나 하나 모두 씨앗입니다 거목입니다 물러설 곳 없는 거울입니다 심장의 소리 심장의 소리 검은 짐승은 내부의 색에 다름 아닙니다 끝없이 길어지는 몸입니다 몸의 침묵입니다 도약입니다 소문만 무성한 텅 빈 구멍입니다 환대와 박수갈채 두근거리는 침묵과 불협의 지름길입니다 출구 없는 사각의 방입니다 방과 방의 무한증식입니다 곤충의 눈으로 본 단 한 장의 꽃잎입니다 기록되는 동시에 휘발되는 영원이자 순간인 빨강입니다

서로의 머리를 바꿔 얹는 재빠른 손들

수건놀이

등 뒤로 돌고 있는 수건 멈추지 않는 노래 만질수록 모호해지는

단단한 정방의 합

활짝 펼친 날개 

오므라든 입술

행렬

돌고 있습니다 어느 등 뒤에도 내려놓지 못하고 돌고 있습니다

노래가 끝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보기 사진으로 노래하기 사진으로 손 되기 사진으로 시간 잡기 사진으로 정확과 추상을 동시에 움켜쥐기 사진으로 침묵하기 사진으로 열기 사진으로 부수기 사진으로 쌓기 사진으로 활동하기 사진으로 사진하기: 그림으로 여성하기 그림으로 풍경하기 그림으로 자연하기 그림으로 안개하기 그림으로 복원 저편의 미처 끌어올려지지 않는 하나의 傾하기 그림으로 역할 바꾸기 그림으로 찌르기 그림으로 그림하기: 그림으로 보기 그림으로 노래하기 그림으로 손 되기 그림으로 시간 잡기 그림으로 정확과 추상을 동시에 움켜쥐기 그림으로 침묵하기 그림으로 열기 그림으로 부수기 그림으로 쌓기 그림으로 활동하기 그림으로 사진하기: 사진으로 여성하기 사진으로 풍경하기 사진으로 자연하기 사진으로 안개하기 사진으로 복원 저편의 미처 끌어올려지지 않는 하나의 傾하기 사진으로 역할 바꾸기 사진으로 찌르기 사진으로 그림하기

견디기
견디기

옛날옛날 이야기를 노래하던 검은 가수와 미래를 읊조리던 초록의 점쟁이가 살았습니다 길은 길고 길은 무겁고 길은 무너지는 중 길은 무너지는 동시에 뻗어나가는 중 멀리서 울리는 종소리를 가수와 점쟁이가 함께 들었습니다 한명은 북극에서 한명은 남극에서 듣고 생각에 잠깁니다 종소리는 손이 많은 어두운 구멍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매혹을 형상화한다면 그건 이 리듬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그때부터 둘은 영혼이 이어진 것처럼 하나의 심장을 나눠 쓰는 것처럼 서로를 속속들이 예감하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이 오른쪽 눈으로 눈물을 흘리면
한 사람이 왼쪽 눈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채 모든 일이 일어났습니다 백일 동안 회색 비가 내리고 세계의 모든 여성들이 소리의 진원을 찾아 이끌리듯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피리소리를 따라가는 아이들처럼 길고 긴 띠가 세계 곳곳에서 관찰되었고 옛 문헌에 따르면 누군가는 스프를 아궁이에 올려놓은 채로 누군가는 우는 아이를 침대에 내버려둔 채로 누군가는 춤을 추다말고 스텝을 거리로 끌고나와 날아갈 듯 스윙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은 아주 일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모든 집과 집과 집의 불이 꺼졌기에 더 이상의 기록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여성의 집단이주 사건은 쉽게 마녀의 소행으로 결론 내려지고 각국에는 함구령이 내려졌습니다 기억을 봉쇄당한 자들은 매일 밤 횃불을 높이 쳐들고 광장을 몇 바퀴 돌다가 결국 흩어져버렸습니다 가수와 점쟁이는 각각의 이끌림에 따라 하나의 점을 그리고 그것에 이름을 붙였습니다 둘의 머릿속에 동시에 전구가 켜지듯 하나의 동그란 빛으로 가득한 어둠이 생겨났습니다 점점 커졌습니다 둘은 망설임 없이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따듯한 어둠 둥근 어둠 이전도 이후도 없는 온전한 어둠 


그 이후의 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견디기
견디기

졸린 눈을 비비면 깨끗해지는 생각들

오래도록 나무와 강을 보며 서 있으면 문득 
무언가 그리워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디아스포라

안개 속에서 부서지는 희미한 빛 

떠오르는 얼굴과 얼굴들 

아무도 훼방 놓지 않는 아름다움 
수호하는 날개들

울고 난 직후의 단정한 미소로

 

디아스포라

날개의 검정이 허공을 쓸어내리는 곡선의 유려함으로

@: 왜 그런 얘기 있지, 창문에 찍히면 영혼을 잃는다는 말 대상의 어떤 기저에 숨겨져 있던 것을 창문이 포착하지 못했다면 그런 말은 애초에 생겨나지 않았을 거야 

J: 창문의 등장은 문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종종 가장 정확하게 풍경이나 인물을 모사해야 했던 문의 책무를 창문이 다른 방식으로 함께하기 시작했다 창문은 문의 멍에를 함께 짊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E: 처음엔 창문이 단지 인물의 중요한 시기들을 위한 용도였다면ㅡ어마어마하게 긴 노출 시간과 창문의 거대한 물성과 비싼 가격 때문에ㅡ

F: 모두가 작은 창문을 들고 다니는 지금은? 어떨까? 누구나 세계 어디서든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지금은?

 

P: 창문은 더 이상 그런 복속 안에 있을 필요가 없지 다른 방식으로 대상을 전유할 자유를 얻게 된 거 아닐까? 기록은 늘 정확함을 추구하지만 기록은 늘 미끄러지는 과녁이니까 

@: 그럼 이제 문도 창문도 마음껏 자신만의 춤을 출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 경계 자체가 허물어지는 거지 

검독수리와 여성들의 군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여성들 노래하는 여성들 떠나는 여성 돌아오는 여성 돌고 돌아 다시 처음의 자리에서 두 발 단단히 보도블록을 밟는 여성 거대한 숲처럼 여성들 숲처럼 숲처럼 

투명하고 텅 빈 하얀 숲 

얼굴은 늘 표정을 견디지 
아무 메시지를 담지 않아도 창작된 것은 저절로 메시지를 내포하게 되고
결국 의도하지 않은 지점까지 흘러가버려

그런 아름다운 오독이 있다
무섭다고 해도 좋아
모두가 널 보고 있다고 
보는 사람에서 보여지는 사람이 되는
네가 좋아

아무리 떠나도 당도할 수 없는 영토가 있고 종종 나는 무엇을 찾아 헤매는지도 모르고 한참을 헤매고 헤매고 그건 결코 발견할 수 없기에 도착은 끝없이 지연되고 헤맴은 지속 가능해진다 그걸 천사들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면 타락한 천사의 추락이라고 말해도 된다면 천사라는 관념 자체가 헛되고 헛된 죄의식을 불러일으켜 그럼 그걸 엄마라고 불러도 좋아

천사는 세상에 참 많지
엄마는 세상에 참 많지
계속되는 것들
피처럼 돌고 도는 것
대를 이어 반복되는 순환의 기이한 시스템
리듬
그리고 연결
연결 연결 연결 

짐 자무쉬의 영화 <Stranger Than Paradise>에서 헤맴은 어떤 방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는가? 나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것과 유사한 서사구조를 가진 한편의 영화를 바로 떠올렸는데 왕가위의 <Happy together>였다 홍콩에서 아르헨티나로 이구아수폭포를 찾아 떠나는 연인들 이러한 상징을 가진 서사 

많고도 많다
견디다 못해 떠나는 
사람들 얘기

떠나도 결국 아무런
발견도 없어서
슬퍼지는 얘기

완벽하게 선한 사람도 완벽하게 나쁜 사람도 없어
낙원 같은 건 없어

다 알면서

찾지

가수는 입을 다물고
점쟁이가 미래에 등을 돌릴 때

귓속말 귓속말

수건놀이

세계의 모든 여성들이 모두 한 번씩은 수건을 쥐었지
누구의 등 뒤에 놓이기도 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닳고 끊어진 검은 실뭉치가 될 때까지
만지고 만지고 만지고 또 만진 것을

노래가 멈춰도 끝나지 않을 이상한 놀이를 하고 있어

즐겁니?
좋니?

그렇지는 않지 그저 감촉을 기억하는 거지
예쁘게 울기 위해
잊히지 않고 잊지 않을 거야

호명하는 건 두렵지만 좋은 일이니까 
차가운 것을 만지는 두 손의 온도
색을 불러 세우는
창끝의 뾰족 

세계의 커다란 엄마가 되어 내려다본다면 천사가 되어 내려다본다면 주황과 이제의 작품들이 걸려 있는 전시실은 아마 거대한 콜라주 같지 않을까 여러 얼굴 여러 풍경 여러 동물이 직조된 거대한 퀼트 담요처럼 아름다울 거야 천공을 향해 흔들리는 뭉치들처럼 만지고 만지고 또 만진 돌고 있는 수건처럼 아름다울 거야 세계의 시점에서 보면 우린 모두 이방인이고 엄마 없이 태어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잖아 각각 다른 공간에서 다른 시간 속에서 잠시 살아볼 수 있을 거야

종종 
세계 최초의 엄마에 대해
세계 최초의 천사에 대해 생각한다

나무와 강을 바라보며 선 한 사람
공을 차는 한 사람
옷깃을 세운 거리의 한 사람
노래를 부르는 영원한 한 사람

모든 여성들의 내면에는 깊은 우물이 있다
점점 수위가 높아지는 우물이다

두근거리는 리듬 속에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검은 가수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초록 점쟁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심장을 나눠 쓰는 
여성이다

이제 당신의 얼굴을 꺼낼 차례다

길은 끝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아름답다

커다란 텍스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고 긴 띠 
사람들의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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