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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그림 그린 자: 

홀로 함께, “삶의 어떤 시간”을 둘러싼 경계 그리기

이규
 

주황이제

황제이주

이제주황

 

 

 

 

나는 이름 없는 사람! 당신은 누구세요?

 

 -에밀리 디킨슨

 

나는 이름 없는 사람! 당신은 누구세요?

당신도-또한-이름 없는 사람인가요?

그럼 우리 한 패인가요?

말하지 마세요! 사람들이 알릴 거예요-당신은 알아요!

 

어찌나 재미없는지요-뭐 대단한 사람-인 양 구는 것은요!

어찌나 공공연한지요-개구리처럼-

자신의 이름을-유월 내내 

칭송하는 늪을 향해-말한다는 것은요! 

 

 

 

 

내 안에 반역자가 있다. 바로 그림자 괴물이!

글로리아 안살두아, 라 프론테라: 메스티소 신여성 

 

 

 

우리는 어떻게, 어디로 움직이는가, 움직여가는가?

 

그 움직임, 그 기세에서, 생성되고, 또 생성적으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언제 생의 약동을 느끼는가? “생의 심장”이, “성”이, 생성生成/生性될 때일까?  

 

 

이 생각은 단순하면서, 성(sex)과 별다를 것도 없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지금도 유효한 고전 《제2의 성》(1949)에서 유년기를 다룬 장에 “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라 썼다. 이가 사실이라면, 갓 태어난 아기도 다 큰 처녀애도 아닌 “우리”는 2019년 어느 순간에라도 다시 부상하리라. 

 

책의 말미에 보부아르가 도래하는 것으로 본 “태어나는 중인, 자유로운 여성”을 떠올려 본다. 이 사고의

“연쇄”를 따라가보자. 당신, 두 번째 사람은, 마치 레이디 가가처럼 이렇게 태어났든, 혹은 이러저러하게

태어났든 간에 그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바로 지금’, 두 번째로 태어나는 중이다. 보다 구체적인 성별

규범은 ‘태생적으로’ 시간의 흐름을 구획하지만, 여기에 주황과 이제(“황제”)는 함께, 아웃사이더가 아니라 먼저 헤쳐나가는 자로서, 갑작스럽고 은밀하며 예리하게 여성적 지점과 종지점을 자료화하고, 젠더 트러블을 젠더 트래블로 변모시킨다. 

 

우리와 타자는 몇 번이고 함께 등장하며 서로에 거주한다. 당신의 움직임은 당신 자신의 교차점, 내밀한

타자성의 지점들이 된다. 각기 다른 시간과 각기 다른 장소로부터 여기에 함께 도착한 시각 작업들에서

생생히, 또 반쯤 수행적으로 그려졌듯이, 비행하는 영혼은 이토록 장대해진다.

 

사진가 주황과 여성 “타자들”의 우연한 만남을 보라. 뉴욕의 아무 거리에서나 마주치게 된, 앳된 동양인으로 보이는, 무명의 여성들 가운데 여럿은 주황의 “실내/내부” 초상 속 인물들로 투사된다. 거기에 나타나는

“두 번째” 반영적인 모습을, 그러나 이차적이지 않은 그 모습을 보라. 화가 이제가 동북아의 국경을 따라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기까지 홀로 여행하며 그려낸 시퀀스를 보라. 이러한 에너지를 흩뿌리는 역동의

선은 회화적 생기가 집약적으로 응축된 그녀의 작업에서 파편적으로, 율동적으로 재등장한다. 거기에 나타나는 “두 번째” 회상의 모습을, 그러나 이차적이지 않은 그 모습을 보라. 각각은 작가 자신의 일상적 재탄생을 재무대화한다. 마치 처음으로 그녀 앞에 쌓여진, 혹은 부분적으로 미리 규정된 시간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그곳으로 얽혀들어가듯이. 이 둘의 작업 모두에서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이타성을, 그리고 변화를

부드러이 함께 대면하고 있는지 감지한다. 주변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주황의 카메라 렌즈와 이제의 역동적인 붓질은 그 지점에서 우리 모두가 의지하게 되는 탈 것이 된다. 

 

 

[그림]

 

 

 

 

기차처럼, 버스처럼, 바람처럼, 어둠 속에 여기저기 웅크린 짐승들처럼, 튀어나오고 사그라들며, 우리는

오고 또 간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거기에 계속 존재한다. 그러한 에밀리 디킨슨 식의, 미시사회적 “노바디”는 모두 안에, 모두의 몸 속에 있다. 그렇더라도 “여성”, “제2의 성”, “타자(화된)” 인류종의 경우, 이렇게 종종

유전적으로 소외되고 익명화된 주체의 존재론적 탄력성을 젠더로 구성한다. 어떤 특수하고 젠더화된 자기 반영성을 독특한 내적 근육으로 남겨놓으면서 말이다. 비범한 것이 아닌 평범한 독특함, 이렇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얼굴 없는 평범함을 다시 “천국보다 낯설게” 하는 것은 바로 진행을 계속하는 힘, 그러나 온아하고 스산한 힘이다. 

 

본 전시의 기획이 주목하고 또 생생하게 주제화했듯이, 이주, 낯선 영토 안으로 외‘출’하기를 누군가에게 노‘출’되는 ‘경’험으로 바라보자. 사려 깊으면서 개념적으로 모험적인 기획자의 해설 또한 내부(자)-외부(자), 국내-외국, 과거-미래와 같은 배치가 클리셰로 전락할 흔한 위험을 능란하게 우회한다. 당신이 여기서 보는 것은 계속되는 여성들의 나열이라기보다 그들을 관통하는 질문들의 열람실이다. 자신의 풍경으로 누가

보내서 당도했든 자발적으로 떠났든, 어떻게 그녀는 그렇게 정박지의 밧줄을 풀고 닻을 올린 채 시간의

시험에 맞서고 또 이를 견뎌냈는가? 이렇게 “월경하는” 일련의 자아들의 작동 안에서는 누가 이행하고, 이행 중에 있으며 또 누구와 함께 이행하는가? 어떻게 그녀는 종종 두려움의 대상이라 제시된 그런 이방인들,

타인들과 동행하는가? 

 

여성적 신체에 깃든 지평의 미래는 움직인다. 그녀는 거기에 존재하고, 그곳으로 간다. 자신의 다성적인,

성간의 다양성 그리고 취약함으로. 숱한 대도시와 그 사이사이를 촘촘히 아우른 공간에 어떻게든 침투하는 소수자로서든, 스스로 선택한 전망을 벗어나거나 거기에 녹아들며, 장거리 야간 버스의 한 구석에서 보다

자유로이 유랑가는 탐험가로서든, 미시현상적으로, 어쩌면 이상할 정도로 대담하게. 자신을 풍경화하면서 이러한 일상의 요지경 속 인물들은 자신의 안으로든 밖으로든 탈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자 안팎으로, 자신의 삶 속 또 다른 시간의 안으로 또 밖으로, 스스로를 또 다른 자신과 접속시키며 움직인다. 이렇게 이행 중에 있는 무작위(화된) 여성 주체는 보통 자신을 구획에 가두는 다양한 경계에 “소외”되거나 “주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경계를 그려낸다. 그들의 시선은 대체로 사선을 향하며, 이야기를 건넨다.  

 

 

[그림2]

 

 

 

 

새벽 다섯 시, 첫 햇살이 비출 때면 과거의 잡부들이

창틀에 기대어 내다본다 어느 화물차가 

들어오기를 바랐던지 또는 떠나가리라 여겼던지

 

온갖 일이 일어나는 세상 바깥에 서서 

 

에이드리언 리치, <가장자리>

 

 

어찌, 당신은 어찌, 그리, 하는가. “과거의 잡부들”이 품은 희망은 시간의 열차에 올라탔다가 내리기를 반복한다. 당신이 원한다면 새벽 다섯시에, 오후 다섯시에, 스산한 올곧음의 시간 또는 회색빛 낙관의 시간에.

주황과 이제의 작품 속 인물들은 후자보다는 전자에서 좀 더 섬약하(지 않)게 내면을 향하며 섬세하게 일렁인다. 인물들은 미묘하게 스스로를 이산시키는 형상, 유연한 전미래적 형상을 그려낸다. 이 전미래에서 시간은 자신을 찾는 주소(l'adresse)로 변모한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어디에서 보고 있는가? 그녀는 어디로 향하는가? 서로 엮인 분리가 느껴지는가? 그녀는 관객을 보고 있다. 자신을 보고 있다. 동시에 그녀는 둘 다 보지 않는다. 뷰파인더여, 그녀를 놓아주라. 붓이여, 그녀가 속에 품은 나침반을 신뢰하라. 당신을 바라볼 때조차 그녀는 당신이 어디를 향해야 할 지 모르도록 당신을 사로잡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녀가 바라보고 목격하는 대양 저편의 장소, 끝없이 열린 장소란 그러하다. 그곳에서 그녀는, 말하자면

자신의 세번째 눈으로, 다면적 자아에게 전신을 친다. 여성적 시간 여행자와 스스로를 장소화하는 그들의

힘이 지닌 저 고정되지 않는, 고정할 수 없는 흔적의 응시를, 그 응시들의 비선형적인 진로를, 시련 어린 탈주를 가능한 온전하고 진지하게 접수하라. 아마도, 매 우연마다, 그것은 1989년 획기적인 에세이  『여성,

원주민, 타자』에서 트린 민하가 목도한 것처럼, 거친 부드러움을 지탱하며, 그들 질료의 모체적 핵심을 형성하는 “‘나’의 무한한 층위"일 것이다. 민하가 말한 “사설 동물원” 따위 말고 그 어디에라도 속하기를 그녀가 열망한다면, 우선 “#나도존재한다"고 외치고자 할 것이다. 설령 성기고 종잡을 수 없는 방식으로라도.

딱 이렇게나 저렇게가 아니라 단지... 혼자로서 그러할 것이다. 기실 그녀는 하나 안의 모든 것이니까.

 

밀레니얼 세대 가수 태연(1989년 생)은 2019년에 발표한 실연 노래 <사계>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가도 돼/ 뒤돌아볼 때쯤엔 난 없어/ 우리 꽤 괜찮았어/ 그거면 된 거야.” 이런 우리 자매에게 주파수를 맞추어 당신은 태연 풍으로(시원스럽고 담담하게)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헤쳐나가며, 경계를 넘나들며,

신 안의 낯선 자를 좇아, 이곳의 천국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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